종중소식
작성자 복수 상무
작성일 2011-03-19 (토) 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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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정씨 상신17인중 창손 공 괄 공
 조선시대 동래정씨 상신 17인
조선시대 동래정씨 상신 17인
 
조선조  동래정씨 상신 17인 상신(相臣)은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최고관직(最高官職)으로 영의정(領議政) 좌의정(左議政) 우의정(右議政)의 3인으로써 의정부(議政府)를 조직(組織)하니 이를 3상(三相) 3공(三公) 또는 3정승(三政丞) 이라하여 국가(國家)의 최고기관(最高機關)이고 그 임무(任務)는 백관(百官)을 통솔(統率)하고 국정(國政)을 총괄(總括)하였다.
 

정 창 손(鄭昌孫)

1402(태종 2)~1487(성종 18) 14世. 조선(朝鮮) 전기(前記)의 문신(文臣).자(字)는 효중(孝中) 호(號)는 동산(東山), 중추원사 흠지(中樞院使 欽之)의 아들. 1423년(세종 5)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426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권지(權知) 승문원 부정자가 되고, 이어 집현전의 저작랑과 교리를 역임하면서《통감훈의 通鑑訓義》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1441년 사섬서령(司贍署令)으로 전임하였다. 1443년 집현전응교가 되었는데 재직 중인 이듬해 한글의 제정을 반대, 《삼강행실》을 반포한 뒤에 충신• 효자• 열녀의 무리가 나옴을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은 사람의 자질에 있는 것이지 언문으로 번역한다고 하여 모두 본받는 것은 아니라고 하다가 파직, 투옥되었다. 같은 해 풀려 나와 응교로 복직된 뒤 1445년 집의가 되었는데, 이듬해 세종이 불경(佛經)을 간행하려 하자, 왕실에서 흥천사(興天寺)를 다시 고쳐 짓고 또 경찬회(慶讚會)를 설치하였음을 들면서, 불교는 괴탄(怪誕:괴상하고 헛된 소리)하고 환망(幻妄)하여 나라를 미혹(迷惑)시키고 조정을 그릇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 왕실의 불교숭상을 강력히 반대하다가 다시 좌천되었다. 이듬해 용서를 받아 직예문관에 등용되고, 같은 해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 급제하여 집현전 직제학을 거쳐 1448년 집현전 부제학이 되었다. 그 동안 여러 번 왕실의 불교숭상에 대하여 반대하는 소(疏)를 올렸으나 세종은 듣지 않았다. 1449년 부제학으로 춘추관편수관과 수사관(修史官)을 겸직하면서《고려사》•《세종실록》•《치평요람 治平要覽》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문종이 즉위하자 우부승지를 거쳐 1451년(문종 1) 대사헌이 되었는데, 조정의 관원들로부터 남달리 깨끗하며 절조를 잘 지키면서 자신의 산업(産業)을 일삼지 않는다는 찬사를 받았다. 이어 제학•대제학•병조판서 등을 지내면서《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1453년(단종 1) 이조판서가 되었는데 외척 홍원용(洪元用)과의 상피관계(相避關係)로 사헌부에서 피혐(避嫌)하기를 주장하였으나 왕의 명으로 피혐되지 않았다. 1455년(세조 1) 우찬성으로 세자 좌빈객(世子左賓客)과 판이조사를 겸하였으며, 좌익공신(左翼功臣) 3등에 녹훈되고 봉원군(蓬原君)에 봉하여졌다. 이듬해에 사위 김질(金質)이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단종의 외숙인 권자신(權自愼) 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모의하였는데, 일이 여의치 않자 질(質)이 이 사실을 자신에게 폭로함에 이를 세조에게 고변(告變)하였다. 이 공으로 좌익공신 3등에서 1자급을 올려 2등 수충경절좌익공신(輸忠勁節佐翼功臣)이 되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가 더하여졌으며 부원군(府院君)으로 진봉(進封)되었다. 이어 대사성• 대제학을 겸직하고 우의정에 올랐다. 그의 이러한 처사로 절의를 숭상하는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 등으로부터는 많은 비난도 받았다. 그러나 세조로부터는 대단한 신임을 얻어 1457년 좌의정이 되었으며, 이듬해에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여 사직을 하자 세조는 1일간 조회를 정지하고 부의(賻儀)로 미두(米豆)50석, 종이 100권과 관곽(棺槨)을 내려 주었다. 그리고 여묘(廬墓)살이를 하고 있는 그를 세조는 기복(起復:나라의 일이 있을 때 상중에 있는 대신을 3년상이 지나기 전에 벼슬에 임명하던 제도)시켜 영의정(領議政)으로 삼았다. 이에 여러 번 소(疏)를 올려 이를 사양하였으나 세조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1462년 세자에게 양위할 것을 말하였다가 삭직되고 여산(礪山)에 부처(付處)되었으나, 곧 용서받고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에 복작(復爵)되었다. 1468년(예종 즉위년) 예종이 즉위한 뒤 남이(南怡)• 강순(康純)의 옥사를 잘 다스려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올랐고, 1469년 성종이 즉위하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로 승품되고 원상(院相)이 되었다. 1470년 나이가 70이 되어 치사(致仕: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궤장(궤杖)이 하사(下賜)되었다. 1456년(세조 2)에 죽은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懿敬世子)를 이해에 덕종(德宗)으로 추존하는 데 적극 앞장섰다. 한편, 남효온(南孝溫)이 상소하여 세조 즉위 초에 폐위(廢位)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 복위를 주청하자 소릉의 폐출에 참여한 그는 복위에 반대하였는데, 후일 복위된 뒤 이로 인하여 지탄(指彈)을 받았다. 1475년 영의정에 재임되었으며, 이듬해 왕비의 비행으로 왕이 왕비를 폐하려고 할 때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강력하게 간하지 못하였다. 그 뒤 윤비(尹妃)는 빈(嬪)으로 강등되어 자수궁(慈壽宮)에 따로 거처하다가 1479년에 폐위되고 이듬해 사사(賜死)되었다. 이듬해 계비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尹氏)를 비로 책봉할 때에 진책정사(進冊正使)가 되었다. 1483년 세자사(世子師)를 겸하면서, 세자서연(世子書筵)에 매일 빈객 1인, 낭청 2인, 대간 각 1인으로 하여금 진강(進講)하게 하였다. 이후 여러 번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다가 1485년 나이 84세에 영의정으로 재임된 지 1년 만에 사직하였다. 그리고 2년 뒤인 1487년 86세로 죽자 왕은 청빈(淸貧) 재상(宰相)이라 하여 많은 물품 등을 부의(賻儀)로 하사하였다. 그 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에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윤씨 사건의 논의(論議)에 참여한 죄로 윤필상(尹弼尙)• 한치형(韓致亨)• 한명회(韓明澮)• 어세겸(魚世謙)• 심회(沈澮)• 이파(李坡)• 김승경(金升卿)• 이세좌(李世佐)• 권주(權柱)• 이극균(李克均)• 성준(成俊) 등과 함께 십이간(十二奸)으로 몰려 부관참시(剖官斬屍)되었다. 그러나 1506년(중종 1)에 신원(伸寃)되고 청백리(靑白吏)에 녹선(錄選)되어 부관참시 때 철거한 석물(石物)을 다시 세우고 예로써 개장(改葬)하였다. 박학(博學) 강기(綱紀)하고 문장과 글씨에 능하였으며, 풍채가 준수하고 수염이 배까지 내려왔다고 한다. 성종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으며, 시호(諡號)는 충정(忠貞)이다.



정 괄(鄭 괄)

1435(세종 17)∼1495(연산군 1). 15世. 조선(朝鮮) 전기(前記)의 문신(文臣). 자(字)는 경회(慶會). 영의정 창손(昌孫)의 아들이다. 1456년(세조 2) 생원시에 합격한 뒤 음보(蔭補)로 관도에 나가 주부와 공조좌랑• 정랑을 지냈다. 1465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정과(丁科)로 급제하고, 사예를 거쳐 장령으로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1473년(성종 4)에는 대사간에 올라 언로의 확충, 내수사(內需司) 장리(長利)의 폐단 시정, 과거급제 정원의 증가, 관리 서용의 새 기준 마련 등 국정 전반에 걸친 활발한 언론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병조의 참지 •참의를 역임하고 황해도관찰사로 승진, 잠시 외직(外職)에 있다가 다시 돌아와 한성부 좌윤• 대사헌을 거쳐 이조참판이 된 지 수개월 만에 이조판서에 발탁되어 3년간 전형(銓衡)을 담당하였다. 그 뒤 지중추부사• 한성부판윤• 병조판서• 우찬성• 도총관• 형조판서 등 요직을 역임하였고, 1490년 경상도관찰사로 나가 치적을 올렸으며, 1492년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가서 황태자의 책봉(冊封)을 축하하고 돌아와 다시 병조판서를 지냈다. 이듬해 평안도관찰사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을 요청하였고, 조정에서는 평안도는 중국사신의 경유지(經由地)이므로 명망자(名望者)가 파견되어야 하는 곳이라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연산군이 즉위한 뒤 우의정으로 승보되었으며,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오는 길에 칠가령(七家嶺)에서 졸(卒)하였다. 그는 맡은 일을 착실하게 수행하고 결단력이 있었으며, 기상(氣像)이 엄준하여 대신의 풍도가 있었다고 한다. 시호(諡號)는 공숙(恭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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