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중소식
작성자 복수
작성일 2010-07-18 (일)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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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貞公諱昌孫 졸기(卒記)

  충정공(휘 창손)졸기 副
성종(成宗)18년(丁未:1487)정월(壬寅朔)27일(戊辰)⊙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정창손(鄭昌孫)이 졸(卒)하였는데,철조(輟朝)와 조제(弔祭).예장(禮葬)을 예(例)와 같이 하였다.
정창손의 자(字)는 효중(孝中)이며.본관(本貫)은 동래(東萊)인데.중추원사(中樞院使)정흠지(鄭欽之)의 아들이다.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여 영락)永樂)계묘(癸卯)년에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고.선덕(宣德)병오(丙午)년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권지 승무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子)에 보임(補任)되었다가 곧 집현전 저작란(集賢殿著作郞)으로 옮기고 여러 번 승진하여 교리(校理)에 이르렀다.
정통(正統)신유(辛酉)년에 사섬서 령(司贍署令)에 제수(除授)되고.임술(壬戌)년에는 승진하여 사전장 부정 (試典醬副正)에 임명되었다가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로 옳겼다.)에
을축(乙丑)년에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임명되어 강개(慷慨)하게 곧은 말을 하였고.병인(丙寅):1446)년에는 언사(言事)로 좌천되어 군기시 부정(軍器시副正)이 되었다.
정묘(丁卯:1447)년에는 직례문관(直藝文館)에 임명되었다가 중시(重試)에 급제(及第)하여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에 제수되었고.무진(戊辰)년에 부제학(副提學)에 승진하여(고려사(高麗史)와 세종실록(世宗實錄)을 편수(編修)하는데 참여하였다.
경태(景泰)경오(庚午:1450)년에 승정원 좌부승지(承政院左副承旨)에 임명되었다가 우승지(右承旨)로 옮기고.신미(辛未)년에 가선 대부(嘉善大夫)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올라 조정의 기강(紀綱)을 크게 떨치게 하였다.임신(壬申)년에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옮기고.계유(癸酉)년 세조 정란(世祖靖란 )에 뽑혀서 자헌대부(資憲大夫)이조판서(吏曹判書)에 제수되고.갑술(甲戌:1454)년에는 자급(資級)이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
을해(乙亥:1455)년에 세조(世祖)가 즉위하자.숭정대부(崇政大夫)를 가(加)하여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에 임명되고 추충좌익공신(推忠佐翼功臣)의 호(號)를 받고 봉원군(蓬原君)에 봉해졌으며.병자(丙子)년에는 숭록대부(崇祿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이때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등이 난(亂)을 꾀하자,정창손이변(變)을 고(告)하여 경절공신(勁節功臣)의 칭호가 더 내려지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봉원 부원군(蓬院府院君)에 오르고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겸(兼)하였는데.대개 문형(文衡을 맡은 것이였다.곧 대광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에 올랐다.천순(天順)정축(丁丑:1457년에는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무인(戊寅:1458)년에는 어머니(母:欽之 夫人)상(喪)을 당하였는데.예(例)에 부인은 정조(停朝)가 없었으나 임금의 특명으로 조사(朝市)를 하루 정지하여 특별한 은혜를 보였다. 장사(葬事)지냄에 미쳐 정창손이 묘여(墓廬)에 있으면서 한 번도 사가*私家)에 오지 않았는데. 이를 세조(世祖)가 듣고 직제학(直提學)서강(徐岡)을 보내어 내온(內온)과 소찬(素饌)을 내려주었으며.묘여(墓廬)에 돌아가지 말고 서울 집에 있으라 하였으나 예전대로 무덤을 지키고 있었다
세조가 장차 평안도(平安道)에 거동하려고 하면서 정창손을 서울에 머물게 하여 지키고록 하려고.특별이 기복(起復)하여 영의정(領議政)을 삼았으나.전문(篆文)을 올려 사양하자. 어서(御書)로 유시(諭示)하기를.나에게 경(卿)은 좌우(左右)의 손과 같으니 장차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친이 가서 기복하도록 하라  하고 갑자기 순행(巡幸)을 정지하였는데.정창손이 또 전문을 올려 굳이 사영하였다 .경진(庚辰:1460)년에 복(服)을 마 내전(內殿)으로 불러 들여서 위로하고 .단의(段衣) 한 벌을 내려주며 부원군(府院君)으로 봉(封)하였다 .신사(辛巳:1461)년에 영의정(領議政)에 대배(大拜)되었다가 임오(壬午:1462)년에 어떤 사건으로 여산군(礪山郡)에 귀양 갔으나 곧 불러서 부원군(府院君)에 봉(封)해지고. 특별히 잔치를 내려서 위로해 주었다.

성화(成化)무자(戊子:1468)년에 예종(睿宗)이 즉위하여. 남 이(南怡)등을 처리하여 추충 정란 익대 공신(推忠定難翊戴功臣)의 칭호(稱號)가 내려지고 기축(己丑:1469)년에 임금(成宗)이 즉위하자 원상(院相)으로 서무(庶務)를 참결(參決)하였다.

신묘(辛卯:1471)년에 순성 명량 경제 좌리 공신(純誠命亮經濟佐理功臣)의 칭호(稱號)를 받았으나.나이가 70(七十)인 까닭으로 치사(致仕)하였는데.윤허(允許)하지 않았고.임진(壬辰:1472)년에 궤장(궤腸)받았고.
을미(乙未)년에 영의정(領議政)에 대배(大拜)되었으나,을사(乙巳:1485)년에 늙었다고 하여 사직(辭職)하고 ,다시 부원군(府院君)에 봉(封)해졌는데,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86세(八十六歲)이다.시호(試號)는 충정(忠貞)인데,임금을 성김에는 절의를 다한 것이 충(忠)이고,도(道)를 굳게 지키고 굽히지 아니한 것이 정(貞)이다.

아들은 정 개(鄭 价).정 칭(鄭 칭).정 괄(鄭 괄)이고 사위는 김 질(金 질:左議政)이다.

사신(使臣)이 논평(論評)하기를.정창손(鄭昌孫)은 천성(天性)이 조용하고 소탈하여ㅆ었으나 산업(産業)을 경영하지 아니하였고 ,집에는 사는 것이 쓸쓸하고 뇌물(賂物)을 받지 아니 하였으며 비록 지친(至親)이라도 감히 사사로이 간청(懇請)하지 못하였다 .어버이에게 효도(孝道)하고 ,친구에게 신의(信義)를 지켜 정승(政丞)이 된 지 30여년(三十餘年) 동안 한결같이 청렴(淸廉)하고 정직(正直)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었다 .나이가 많아지자 정신이 혼란하여 일을 의론(議論)할 때에 비록 더러 착오(錯誤)는있었으나 조금도 임금의 뜻에 맞추어 아부(阿附)하는 사사로운 마음이 없었다.매양 조정(朝廷)의 모임에서 기거(起居)동작(動作)하는 데에 넘어지면서 오히려 사직(辭職)하지 아니하므로 사람들이 가만이 비난 하였다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전교(傳敎)하기를 청빈(淸貧)한 재상(宰相)이니 부물(賻物)을 넉넉히 주도록 하라, 하였다

                                           성종실록 199권에서(成宗實錄一百九十九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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