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의장
작성자 종중회
작성일 2013-11-20 (수)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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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현(蜂峴)의 유래(由來)

◎ 봉현(蜂峴)의 유래(由來)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이 지역은 양주군 접동면 지역으로 1914 년 장승리(長承里)의 '장(長)'자와 봉현리(蜂峴里)의 '현(峴)'을 따서 장현리(長峴里)라 하고 진접면(榛接面)에 편제되었습니다. 봉현의 지명유래에 관하여는 아래와 같이 3가지 설이 있습니다.

➀'봉현 (蜂峴)'이라는 이름은 '벌우개' '비리개' '버리개' '보루개'라고도 하는데, 조선 초기에 마을 동쪽에 조그마한 고개에 벌집이 있어 오가는 사람들이 벌 때문에 그곳을 피해 다녔다고 하는데, 이러한 연유로 그 고개를 '벌우개', '비리개', '버리개', '보루개' 등으로 불렀으며, 고개 밑에 있는 마을 이름도 '벌이 많은고개 마을'이라는 의미의 '봉현(蜂峴)'이 되었다고 합니다.

□ 蜂峴(벌우개)逸話

➁府尹公墓와 文景公墓는 楊洲 豊壤直洞에 뫼시었는데 後日에 光陵(世祖와 貞熹王后의 陵)으로 함께 禁標(收用)되어 이곳 榛接面 長峴里 山 99 蜂峴의 墓域내 庚坐原에 公의 內外分과 階下로 文景公 內外分의 墓坐를 擇占 하였으며 墓域안에 貞節公 內外分 監察公 內外 모두 8분을 함께 移葬하였다. ※移葬할 때가 睿宗元年(1468년) 겨울철인데 冬眠中인 벌떼가 나와 運柩行列을 막았고 지금 墓를 쓴 자리에서 벌떼가 모두 멈춰 내렸는데 相地官1)에게 地勢를 살피게 한 즉 과시 明堂인지라 벌떼가 멈춘 자리에 墓坐를 擇占 하였으므로 이때로부터 마을 이름을 벌이 넘어 왔다하여 『蜂峴』이고 一名 『벌우개』라고 부르게 된 것은 有名한 逸話이다.

 
1)상지관(相地官) : 조선 시대 풍수지리를 전담했던 전문 관원. 관상감(觀象監)에 소속되었으며 정원은 7명이었고, 서반체아직(西班遞兒職)의 품계를 받았음. 이들은 왕실의 능묘나 태봉(胎峰) 예정지를 고르거나 산릉(山陵)의 조성과 개축 등의 일을 맡아서 처리하였고, 궁궐 등 건물터를 정할 때도 참가하여 영향을 미치는 땅의 기운, 산세 등을 살폈음.
[朝鮮王朝實錄]

예종 1권, 즉위년(1468 무자 / 명 성화(成化) 4년) 10월 4일(경인) 2번째기사

이장하는 정창손과 유균에게 관·곽 및 묘를 만드는 군인을 내려주게 하다.

○傳旨戶曹曰: “蓬原君 鄭昌孫, 遷祖父母、父母及同生墳; 行護軍柳均, 遷父母、妻子墳。 其賜昌孫棺槨各八、油芚八部、紙一百卷、米豆竝一百石; 均棺槨各六、油芚六部、米豆竝四十石、紙五十卷。” 又令承政院馳書于京畿觀察使, 抄給造墓軍人, 昌孫五十名, 均三十名。 

호조(戶曹)에 전지하기를,

“봉원군(蓬原君) 정창손(鄭昌孫)은 조부모(祖父母)·부모 및 동생의 무덤을 옮기고, 행 호군(行護軍) 유균(柳均)은 부모·처자의 무덤을 옮기니, 정창손에게는 관·곽(棺槨) 각각 8, 유둔(油芚) 8부(部), 종이 1백 권, 쌀·콩 아울러 1백 석을 내려 주고, 유균은 관·곽 각각 6, 유둔 6부, 쌀·콩 아울러 40석, 종이 50권을 내려 주라.” 하고, 또 승정원으로 하여금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에게 치서(馳書)하여 묘(墓)를 만드는 군인(軍人)을 정창손에게는 50명, 유균에게는 30명을 뽑아서 주게 하였다.

「初葬豊壤直洞 ,睿宗戊子(1468)以光陵禁標移葬于楊州蜂峴庚坐原夫人合祔時値冬節忽有群蜂遮途不得運柩以傳旨遂入葬于蜂至處以因爲里名云爾----府尹公墓碑中에서」


➂한편 세조와 관련된 지명유래도 전하는데, 세조는 자신의 묘 자리를 구하기 위하여 직접 땅을 돌아보던 중 불길한 땅에 묘 자리를 쓰고 있는 상주를 만났습니다. 그대로 지나칠 수가 없어 300냥을 주면서 "다른 곳으로 이장하라."하고 묘 자리를 잡아준 사람을 물으니 바로 자신이 찾던 이생원이라는 자관이었습니다. 세조가 기이하게 생각하여, 이생원을 찾아 그 집에 이르러 그 묘 자리의 길흉을 물으니 " 그 근방이 길지(吉地)가 있지만 현 장지(葬地)는 당장 300 냥의 큰 돈이 생기므로 가난한 상주에게 금시발복(今時發福)할 자리를 정하여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감탄한 세조는 "당신같이 잘 아는 사람이 왜 산골에서 이 고생을 하느냐."고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는 그의 집을 보며 물으니, "국왕이 친림(親臨)하실 곳이므로 이 곳에 산다."며 짚자리를 문 밖에 깔고 백배사죄 하였습니다. 이생원의 능력에 감탄한 세조는 그와 동행하여 현재의 광릉을 능 자리로 정하였다고 합니다. 그 뒤 광릉에 능을 만드는데, 그 곳에서 큰 벌이 나올 것이라 하여 주관하는 지관이 지금 의 長峴里 ‘벌우개’로 대피하여 큰 독을 뒤집어 쓴 지관을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뒤로부터 이 동네는 '벌우개'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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