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추원사 휘 흠지 卒記
중추원 사 정흠지 졸기
세종 85권, 21년(1439 기미 / 명 정통(正統) 4년) 6월 16일(임진) 4번째기사
전 중추원 사 정흠지 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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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중추원 사 정흠지(鄭欽之)가 졸(卒)하였다. 흠지의 자는 요좌(堯佐)이고 본(本)은 경상도 동래(東萊)인데, 고려 감찰 대부(監察大夫) 낭생(郞生)의 손자이다. 나서부터 총명하여 조금씩 자라매 글을 읽을 줄 알아 성균관시(成均館試)에 합격하고 음관(蔭官)으로 사헌부 지평에 이르렀다. 법을 잡고 아첨하지 아니하여, 좌정승 하윤(河崙)을 탄핵하다가 드디어 먼 지방으로 쫓겨났다. 태종 신묘년에 급제하여, 이조 정랑·병조 정랑·사간원 좌헌납(左獻納)을 거쳐서, 병인년에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 그때 좌의정 박은(朴訔)이 청성 부원군(淸城府院君) 정탁(鄭擢)과 더불어 노비(奴婢)를 소송하다가 마침내 그 노비를 속공(屬公)하게 되니, 은이 내각(內閣)에 들어와서 일을 아뢰다가 인하여 속공함이 적당치 못함을 스스로 진술하매, 흠지가 상소하여 탄핵하기를 청하였는데, 말이 심히 적당하고 간절하였으므로 당시의 논의가 통쾌하게 여겼다. 얼마 안 되어 파면당하였는데, 은의 꺼리는 바가 되어 4년 동안 쓰이지 아니하였다가, 세종이 즉위함에 이르러 봉상시 소윤(奉常寺少尹)으로 기용(起用)되어, 집의(執義)·지형조사(知刑曹事)·대언(代言) 등을 거쳐 지신사(知申事)에 올라, 기밀(機密)을 맡아서 계옥(啓沃)한 바가 많았다. 세종이 일찍이 철원군(鐵原郡)에서 강무(講武)할 때에 짐승을 많이 잡은 자에게 벼슬로 상(賞)을 주고자 하여, 호종(扈從)하는 대신들에게 의논하니, 모두
“좋습니다.”
하였으나, 흠지는 홀로 아뢰기를,
“이제 짐승을 많이 잡은 자를 벼슬시키면 뒤에 전공(戰功)이 있는 자에게는 장차 무엇으로 상을 주려고 하시옵니까.”
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겨 드디어 그 논의를 정지하였다. 뒤에 이조 참판과 사헌부 대사헌이 되고, 형조 판서에 올랐으며 충청·경상·전라 세 도의 순무사(巡撫使)가 되어, 바닷가 고을의 성터를 살펴서 정하였다. 을묘년에 국가에서 함길도에 회령 등 진(鎭)을 새로 설치하여 군무(軍務)와 민사(民事)의 일을 처리하기에 매우 어려우므로, 세종께서 흠지를 관찰사로 삼고자 하여 의정부와 의논하니, 모두 말하기를,
“흠지는 늙은 어머니가 있는데 나이가 80이 넘었으니 멀리 보낼 수 없습니다.”
고 하였으나, 임금이 말하기를,
“어버이가 늙은 것은 한 개인의 집 사사로운 일이며 변경의 일은 중한 일이니, 이 사람을 바꿀 수는 없다.”
고 하여, 드디어 보내고 인하여 좌우에게 이르기를,
“정흠지를 관찰사로 삼고, 김종서를 도절제사로 삼았으니, 내가 북쪽을 돌아볼 근심이 없다.”
하였다. 이어서 흠지에게 명하여 와서 어머니를 보살피게 하고, 이듬해에도 와서 어머니를 뵈옵게 하였으며, 특별히 술·고기·풍악 등을 내려서 어머니를 축수하게 하고, 후하게 하사하여 임지로 돌려보냈었다. 이내, 어머니의 병이 급한 때문에 소환(召還)하여 중추원 사에 임명하고, 이듬해에 어머니 상(喪)을 만나고 병이 들자, 임금이 중사(中使)3046) 를 보내어 고기를 먹기를 권하고, 어의(御醫) 두 사람을 보내어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진찰하게 하고, 연달아 문병하며 여러 번 내자시(內資寺)의 좋은 음식물을 내렸다. 죽음에 미쳐 나이가 62세인데, 임금이 슬퍼하여 이틀 동안 철조(輟朝)하고, 사자를 보내어 조문(弔問)하고 부의(賻儀)를 내리며, 특별히 시호(諡號)를 문경(文景)으로 하니,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함은 문(文)이며, 의(義)를 펴고 강하게 행함은 경(景)이다. 사람됨이 풍채가 수려(秀麗)하여 밖으로는 화(和)하고 안으로는 강(剛)하여 바라보기가 엄연(儼然)하였다. 평상시에 책보기를 좋아하여 한사(漢史)를 외어서 말하므로, 세종이 일찍이 윤회(尹淮)에게 이르기를,
“흠지가 언제 사기(史記)를 이처럼 익혔는가.”
하였다. 또 가산(家産)에 힘쓰지 아니하고, 벼슬에 있으면서 일을 처리할 적에는 대체에 따르기를 힘쓰고 남다른 이론을 세우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였다. 임종할 때에 유서(遺書)로 여러 아들에게 불사(佛事)를 행하지 말기를 가르쳤다. 아들은 갑손(甲孫)·인손(麟孫)·흥손(興孫)·창손(昌孫)·희림(喜霖)이고, 육손(六孫)이 있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4책 219면
【분류】 *인물(人物) / *인사-관리(管理) / *왕실-사급(賜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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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3046]중사(中使) : 궁중의 사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