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사(進士), 경력(經歷), 도사(都事)
□.진사[進士] : 원래 중국 수(隋)나라에서 비롯되어 당나라 때는 수재(秀才:정치학) ·명경(明經:儒學)보다 특히 진사(문학)가 존중되어 유명한 인물이 많이 나왔다. 고려에서도 958년(광종 9) 과거제도를 시행하면서 1차시험에 합격한 자를 상공(上貢:중앙)진사 ·향공(鄕貢:지방)진사 ·빈공(賓貢:외국인)진사라 하였고, 2차시험인 국자감시(國子監試)에 합격한 자를 진사라 하였는데, 이들의 시험과목은 시(詩) ·부(賦) ·송(頌) 및 시무책(時務策) 등이었다.
조선 초에는 문과(文科:大科)의 예비시험인 소과(小科)에 생원시(生員試)만 실시해 오다가, 1438년(세종 20) 진사시도 설치, 문예(文藝:詩 ·賦 ·頌 ·策)로써 시험하여 합격한 100명에게 진사의 칭호와 백패(白牌:합격증)를 주고 생원과 더불어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주었다. 이들은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문과에 응시, 급제하고 벼슬길로 나아가는 것이 정도였다. 한편, 성균관에 들어가지 않는 자는 참봉 ·훈도 ·오위장 등 종9품직을 제수받는 경우도 있었다. 고려 때는 진사가, 조선 전기에는 생원이 우위(優位)였으나, 조선 후기에는 다시 진사가 우위에 있었고, 문과를 단념한 진사는 지방의 지도자로 군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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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經歷] : ㉮.①고려 시대 문하부(門下府), 도총도통사(都摠都統使),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부속 기관인 경력사(經歷司) 등에 두었던 3, 4품의 실무 담당 관직. ꃫ경력사(經歷司). 도총도통사(都摠都統使). 문하부(門下府). ②조선 시대 도평의사사, 관찰사의 속관(屬官)註1), 충훈부(忠勳府), 의빈부(儀賓府), 의금부(義禁府), 개성부(開城府),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사평부(司評府) 등에 속하여 실무 처리를 맡았던 종4품의 벼슬.

註1) : 관찰사 소속의 경력(經歷)을 一云 군사(郡事)라고도 한다.


(用例)
㉠도통사는 공민왕 18년에 각 도에 도총도통사를 두었고 진무는 2인으로 하되 1인은 종2품으로 하고, 1인은 정3품으로 하고, 경력은 2인으로 하되 4품으로 하고, 지사는 2인으로 하되 5, 6품으로 하였다. ; 都統使 恭愍王十八年 置各道都摠都統使 鎭撫二人 一從二品 一正三品 經歷二人 四品 知事二人 五六品 [고려사 권제77, 36장 뒤쪽, 지 31 백관 2 외직]
㉡사간원에서 상소하기를, “…의정부의 사인과 사평부의 경력은 모두 4품이나, 각도 감사의 수령은 모두 다 3품이니, 자급의 높기가 혹은 통정대부에 이릅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 중외의 경력은 한결같이 의정부 사인의 예에 의하여 아울러 4품으로 제수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윤허하였으되, 군관은 한 위계가 한 위계에 엄격하도록 하고, 승추부의 경력은 통정대부로 한정하였다. ; 司諫院上 疏曰… 議政府舍人 司平府經歷 皆爲四品 而各道監司首領 率皆三品 資級之高 或至通政 願自今中外經歷 一依議政府舍人例 並除四品 允之 其軍官則一位 嚴於一位 承樞府經歷 通政爲限 [태종실록 권제8, 4장 앞쪽, 태종 4년 8월 10일(기묘)]
㉯.충선왕 때 문하부(門下府)에 두었다가 곧 폐지하였으며, 공양왕 때 관찰사의 보좌관으로 3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에 1명(4 ~5품)을 두었고, 도평의사사 부속 경력사(經歷司)의 속관으로 1명(3 ~4품)이 있었다.
조선 초기에 충훈부(忠勳府) ·의빈부(儀賓府) ·의금부(義禁府) ·개성부(開城府) ·오위도총부 ·중추부(中樞府) 등에서 행정실무를 맡아보던 종 4품의 관직이다. 후기에는 충훈부 ·의빈부 ·의금부의 경력은 폐지되고 오위도총부에는 4명을 증원하고, 강화부와 광주부를 잠시 두었다가 판관으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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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사[都事] : 고려시대에는 문종 때 상서도성(尙書都省)의 종7품 관직으로 2명을 두었으나, 1275년(충렬왕 1)에 상서성을 폐지하면서 함께 없앴다. 1298년 즉위한 충선왕이 첨의부(僉議府)에 두었다가 곧 폐지하였으며, 1331년(충혜왕 1)에 삼사(三司)에 두었다. 1356년(공민왕 5) 삼사를 폐지하고 상서성을 복구하면서 상서성의 관직이 되었다. 1362년 상서성을 삼사로 환원하자 삼사의 관직이 되면서 정7품으로 되었다.
또한 충선왕 때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에 2명을 두었다가 곧 폐지하였으며, 1389년(공양왕 1)에는 도절제사(都節制使)에 두었으며, 1390년에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와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의 경력사(經歷司)에, 1391년에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에 각각 5~6품, 정원 1명씩을 두었다. 그러나 1392년 도절제사와 도관찰출척사의 도사는 폐지하고 대신 녹사(錄事)를 두었다.
조선 초기에는 충훈부(忠勳府) ·의빈부(儀賓府) ·의금부(義禁府) ·개성부(開城府) ·중추부(中樞府)에 각각 1명씩, 충익부(忠翊府)에는 2명,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에는 4명을 두었으며, 품계는 종5품이었다. 또한 관찰사에도 도사를 두었는데, 관찰사와 함께 지방을 순력하고 규찰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한편, 이와는 달리 원(元)나라가 고려에 설치했던 정동행성(征東行省)에도 종7품 관직으로 2명을 두었다. 1280년 정동행성을 설치한 다음에 두었으며, 낭중(郎中) 이하의 다른 속관(屬官)과 마찬가지로 주로 고려인으로 충원하고 형식상 원나라 황제가 임명하였다. 충렬왕 때의 안향(安珦) ·장유(張瑜) ·박전지(朴全之), 충목왕 때의 신인적(申仁適) ·악우장(岳友章), 충정왕 때의 이인복(李仁復), 공민왕 때의 최개(崔介) ·이공수(李公壽) 등이 그들이다.
1356년 반원적 개혁정치가 추진되어 정동행성을 폐지하면서 없앴다가 1362년에 복구하면서 다시 두었다. 그러나 1388년(우왕 14) 위화도회군을 단행한 이성계가 정동행성을 폐지할 때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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