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정씨(東萊鄭氏)와 주자동(鑄字洞)

우리 동래정씨가 서울 주자동에 거주하였다는 설(說)과 관련하여 몇가지 자료를 올립니다.

◎조선 最古 땅문서 한성부立案 공개

[경향신문 |기사입력 2003-10-19 20:21| 최종수정 2003-10-19 20:21]

조선시대 땅문서로는 가장 오래된 태조때의 토지대장이 발견됐다.

서울역사박물관은 600여년 전인 太祖6年(洪武 30年·1397年) 한성부에서 개인에게 발급해준 땅문서를 나타내는 인증서인 ‘한성부 입안(立案)’을 19일 처음 공개했다.

이 땅문서는 동래 정씨 후손인 정수현씨(64·경기 고양시 일산)가 지난달 22일 이 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다. 박물관은 21∼23일 ‘동래 정씨가(家) 기증유물로 본 조선시대 서울선비의 생활’이라는 주제로 열리는 기증유물특별전을 통해 일반에게 공개한다.

인증서(세로 53.4㎝, 가로 47.2㎝)는 1397년 한성부에서 세자 교육기관인 우필선(右弼善) 官吏 정구(鄭矩·1350~1418)에게 주자동(현 충무로3가 극동빌딩 일대)의 집터 15부(負·토지단위로 500여평에 해당)를 준다는 것을 확인한 내용이다. 조영하 서울역사박물관 유물관리과장은 “조선시대 땅문서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의의가 있다”면서 “1395년 6월 태조가 수도 명칭을 한양부에서 한성부로 바꾼 이후 발급된 최초의 문서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32&aid=0000036891

◎薰陶坊鑄字洞志 著者 權僖 編

刊行年代 1621年(光海君 13). 1책(33장) 판본 活字本(訓練都監字) 사이즈 32.5×20.5cm

本文

"漢陽의 薰陶坊 鑄字洞의 연혁과 풍물, 인물 등을 정리한 洞志. 표지서명은 “鑄字洞志”로 되어 있다. 작성시기가 17세기이며, 흔치 않은 洞志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密昌府院君 朴承宗의 서문에서는 주자동이 명예와 이익을 좇는 사람들이 살지 않고 書冊을 인쇄하는 工人들과 讀書 養病하는 사대부만이 살고 있는 한적한 동네이지만 己卯年(기묘사화)과 乙巳年(을사사화)에 걸쳐 忠孝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음을 칭송하였다. 내용은 空館·祠宇·古跡·風俗·孝子·節婦·名宦으로 구성되어 있다. <公館>은 校書館의 업무와 관원의 구성을 적은 것인데, 鑄字洞이라는 이름이 校書館이 자리한 데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연혁 대신 서두에 들어간 것이다. 내용의 중심은 <名宦>으로서 주자동에 거주한 주요 인물들의 약력을 정리하였다. 舊宅의 소재를 아는 경우 이를 말미에 부기하였다. 열거된 인물은 다음과 같다. 安從約·安瑚·鄭甲孫·曹錫文·權擥·終南守(인명미상)·奇遵·朴世喜·鄭膺·趙佑·安瑛·金釴·蔡世英·李賢輔·丁熿·權應昌·李瀣·柳辰仝·鄭世虎·李之蕃·李山海·朴忠元·朴啓賢·黃琳·金忠甲·韓準·權燧.鄭淑夏·權悏·金時敏·慶暹·權昕. (윤경진)

http://e-kyujanggak.snu.ac.kr/MOK/CONVIEW.jsp?type=MOK&ptype=list&subtype=cg&lclass=03&mclass=&sclass=&ntype=hj&cn=GR33569_00

한양(漢陽)의 남부(南部) 훈도방(薰陶坊) 주자동(鑄字洞)의 동지(洞志)이다. 서적의 반인(頒印)을 담당하는 교서관(校書館)의 외관(外館)이 이곳에 있으므로 주자동(鑄字洞)이라 하였다 한다. 편자 권희(權憘, 1547-1624)의 자(字)는 사열(思悅)이고, 본관은 안동이다. 효행(孝行)으로 천거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고, 80세에 노인직(老人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른 효자(孝子) 권상(權相, 1508-1589)의 아들이다. 선조(宣祖) 1년(1568) 진사가 되고, 선조 17년(1584) 문과에 급제하여 주서(注書), 전적(典籍)을 거쳐 선조 25년(1592) 종묘서령(宗廟署令)이 되었다. 선조 29년(1596) 진위사(陳慰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온 후 호조(戶曹), 예조(禮曹), 형조(刑曹)의 참찬(參贊)을 지냈다. 선조 36년(1603) 주청부사(奏請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로 황해도(黃海道)와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거쳐 광주목사를 역임하고, 임진난(壬辰亂)에 왕실(王室)의 신주(神主)를 모신 공으로 호성선무원종공신(扈聖宣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본서는 공관(公館), 사우(祠宇), 고적(古跡), 풍속(風俗), 효자(孝子), 절부(節婦), 명환(名宦)의 7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관조(公館條)에는 교서관(校書館)의 업무와 관원의 구성을 적은 것인데, 주자동이라는 이름이 교서관이 위치한 데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연혁(沿革) 대신으로 쓴 것이다. 사우조(祠宇條)에는 국사당(國祠堂)이 있고, 고적조(古跡條)에는 성재정(聖齋井), 강신대(講信臺), 탑현(塔峴), 어수정(御水井), 폭포(瀑布)가 기술되어 있다. 풍속조(風俗條)는 주자동(鑄字洞)의 풍속이 순후(淳厚)하여 혼상례(婚喪禮)에 서로 돕고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시행한 사실을 적고 있다. 효자조(孝子條)에는 편자의 부친인 권상(權常)의 전기가 3장에 걸쳐 자세히 기록되어 있고, 뒤이어 순천군(順川君) 관(琯)과 이영윤(李榮胤) 서상남(徐尙男)과 천민인 조명중(趙命仲)의 전기인데 각각 출처를 밝히고 있다. 절부조(節婦條)에는 권규(權規)의 처(妻) 유씨(柳氏)와 천민인 말금(末今)과 비녀(婢女)인 세옥(世玉) 3인(人)의 절행(節行)이 간략히 기술되어 있다. 본서에서 내용이나 양적인 면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명환조(名宦條)이다. 안종약(安從約, 安裕의 6代孫), 안호(安瑚, 從約의 曾孫), 안침(安琛) 형제, 조석문(曹錫文), 권람(權覽), 권건(權健)과 기묘명현(己卯名賢)인 종남수(終南守), 기준(奇遵), 박세희(朴世熹), 정응(鄭膺), 조우(趙佑), 안정(安珽), 김익(金익), 채세영(蔡世英)의 8명 및 이현보(李賢輔), 정황(丁황), 권응창(權應昌), 이해(李瀣), 유진동(柳辰仝), 정세호(鄭世虎), 이지번(李之蕃), 이산해(李山海), 박충원(朴忠元), 박계현(朴啓賢), 황림(黃琳), 김충갑(金忠甲), 권준(權準), 권수(權燧), 정숙하(鄭淑夏), 권협(權) ,김시민(金時敏), 경섬(慶暹), 권흔(權昕) 등 도합 42명의 주자동에 살았던 명환의 전기이다. 이들이 살았던 집이 전기의 끝에 밝혀져 있다. 박승종(朴承宗)은 서문(序文)에서, 주자동은 지역이 외지고 시조(市朝)와 떨어져 있어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은 살지않고, 서적은 인쇄하는 공인(工人)과 독서양병(讀書養病)하는 사대부(士大夫)들이 사는 곳임을 지적한 후, 이곳에서 기준 등 기묘명현 8인과, 정황 등의 을사피화인을 비롯하여 효자(孝子) 권상, 충신(忠臣) 김시민 등이 배출되었음을 언급하여 동지(洞志) 편집의 의의를 설명하고 있다. 동지의 간행은 극히 희소한 일로 서문과 발문(跋文)의 내용과 효자조에서 권상의 효행(孝行)을 길게 적고 있는 점으로 보아, 권희가 부친의 효행을 선양하는데 목적을 두고 편찬한 것으로 판단된다. 전본(傳本)이 극히 희소한 귀중본이다. 다만 본서는 제 32장이 결낙(缺落)되어 있다. (신승운)

http://www.dibrary.net/search/portal/searchStorage.jsp?kwd=%EC%A3%BC%EC%9E%90%EB%8F%99%EC%A7%80

◎東萊鄭氏가 鑄字洞에 居住하였는지에 대한 답변입니다.

주자동에 동래정씨가 거주하였던 사실은 특별전에 전시된 1397년한성부입안 이외에도 {훈도방주자동지}(1621년 간행)의 명환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 기록에는 정구의 胄孫(맏손, 고손자)이면서 기묘명현으로 유명하였던 鄭膺(1490∼1522), 그리고 정구의 5대손이면서 오늘날 망우동 동래정씨의 직계조상인 鄭淑夏(1541∼1599) 등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서울의 중심가 한 마을의 동지에 정숙하 등의 이름이 거명되고 있다는 것은, 적어도 정응과 정숙하 등이 이 곳에 살았음은 물론이고, 본 동지가 편찬되었던 1621년에는 동래정씨가의 사람들이 이 곳에 살았으며 동지의 편찬에도 관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이 때의 동지가 최근까지 동래정씨 정숙하의 후손에게 보관되어왔다는 사실은 이러한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또한 {설학재선생실기}의 사실조의 내용 중 …『終南山下鑄字洞甲第數百間』 이라는 기사로 태종이 주자동 집 수백칸을 주었다고 하였으며, 이 기사의 세주에 『英廟壬申設均役廳 時始毁撤』이라고 하여 1752년에 이르러 이 집이 철거되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사료를 참조하면 1752년경에까지 동래정씨가 이 곳에 살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이 때 이후에는 주자동에 정구 후손들의 근거지가 없어졌거나 약화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이미 그 이전부터 주자동에 살던 동래정씨 중 일부 사람들은 망우동에 이주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주자동 집을 유지하면서 망우동에 별도의 거처를 마련할 수 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http://www.museum.seoul.kr/kor/comm/kh_full_board_view.jsp?id=3&num=3536&p=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