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승지(同副承旨) 정공(鄭公) 묘지명(墓誌銘) 병서(幷序)
우리 고장 선비 중에 송애자(松崖子)라는 분이 계시니, 성은 정씨(鄭氏), 휘는 동후(東後), 자는 후경(厚卿)이다. 본관은 동래(東萊)이니, 동래 정씨는 대대로 갑족(甲族)이다. 문경공(文景公) 휘 흠지(欽之)가 세종(世宗) 임금 때에 형조 판서를 지냈고, 정절공(貞節公) 휘 갑손(甲孫)이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을 지냈다. 정절공의 5세손 돈(燉)이 통훈대부 사헌부 집의(執義)에 추증되었는데, 남쪽으로 내려와 함평현(咸平縣)에 터를 잡았다. 이분이 재흥(再興)을 낳았으니,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에 추증되었고, 재흥이 여탁(汝倬)을 낳았으며, 여탁이 행주 기씨(幸州奇氏) 학생(學生) 수백(秀栢)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출중하게 총명하여 글을 지으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성장하여 누차 향시에 합격하자 사람들이 감히 공의 재주를 따라갈 수 없다고 여겼으나, 공은 도리어 “과문(科文)은 한갓 기예일 뿐이요, 유자(儒者)의 궁극적인 일이 아니다.”라고 하고, 침식조차 잊은 채 성리학 서적들에 몰두하여 연구하였다. 그러나 모친의 봉양을 위해 위기지학(爲己之學)의 뜻을 굽히고 과거 공부를 하여 계해년(1683, 숙종9)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계미년(1703, 숙종29)에 추천을 받아 사릉참봉(思陵參奉)에 제수되었고, 군자감 봉사(奉事)로 옮겨갔다. 을유년(1705, 숙종31)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 전적(典籍)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뒤에 형조 좌랑 겸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이 되었고, 또 병조 좌랑으로 옮겨갔다. 외직으로 나가 함경 도사(咸鏡都事)가 되었다가 돌아와 직강(直講)을 지냈고, 삼 년간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있다가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어 돌아왔다. 또 외직으로 나가 강원 도사(江原都事), 경상 도사(慶尙都事), 전라도 경차관(敬差官), 함경도 경시관(京試官), 울산 부사(蔚山府使)를 지냈다. 누차 장령(掌令)에 제수되었고, 그 사이 사이에 사간원 정언(正言), 사예(司藝), 사성(司成), 군자감(軍資監)과 봉상시(奉常寺), 사복시(司僕寺)의 정(正)을 지냈다. 기해년(1719, 숙종45)에 제주 목사(濟州牧使)에 제수되고 당상관의 품계인 통정대부에 올랐다. 제주 목사를 지내다가 해를 넘기고 돌아왔다. 금상(今上 영조)께서 즉위하시자, 상소하여 권흉(權兇)들의 대역죄를 따졌다가 임금에게 미움을 받아 관직이 삭탈되었다. 얼마 뒤에 서용(敍用)되어 형조 참의에 제수되었다가 곧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옮겨갔고, 양양 부사(襄陽府使)로 나갔다가 돌아와 공조 참의가 되었다.
을묘년(1735, 영조11) 3월 24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77세였다. 임종 때에 자손들에게 집안에서 몸을 닦고 세상에 나가 처신하는 요령에 대한 훈계를 남기고, 편안히 운명하셨다. 안산(安山) 월입피촌(月入陂村)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제주 양씨(濟州梁氏)이니, 학생(學生) 지항(之沆)의 따님이다. 공보다 먼저 돌아가셨다.
슬하에 2남 4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진사 양원(陽元)과 요절한 양숙(陽淑)이고, 딸은 김택현(金宅賢), 이언성(李彦星), 홍제화(洪濟和), 서명장(徐命長)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형국(馨國)이니, 양원의 양자이다. 외손자는 김경집(金敬緝), 김경희(金敬煕), 이중렬(李重烈), 이성렬(李聖烈), 이경렬(李敬烈), 이복렬((李復烈), 홍구수(洪龜壽), 서낙수(徐樂修)이다.
공은 세 살에 부친을 여의어 홀로된 모친을 섬겼는데, 일체 모친의 뜻에 순종하는 타고난 효자였다. 성균관 유학 시절에 모친을 그리워하여 눈물을 흘렸고, 모친이 살아계실 때 과거에 떨어지자 얼굴이 근심으로 가득 찼으나, 돌아가신 뒤에는 거듭 떨어져도 담담하였다. 살아계실 때 근심했던 까닭은 바로 모의(毛義)가 기뻐했던 것과 똑같은 심정이었기 때문이니(註1) 사람들이 공의 효성에 탄복하였다.
정학(正學)을 숭상하여 항상 우암(尤菴) 선생을 찾아뵙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다가 기사년(1689, 숙종15)에 위험을 무릅쓰고 우암 선생의 귀양길에 찾아뵈었다. 젊은 시절에 이성(尼城)의 윤증(尹拯)이 우암 선생의 고제(高弟)라는 말을 듣고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당시 윤증이 스승에 대해 불순한 말을 하였으므로 공이 속으로 그를 의심하였다. 얼마 뒤에 윤증이 스승을 등지는 일이 발생하자 남쪽 고을의 선비들이 윤증에게 물들어 제멋대로 우암 선생에 대해 쑥덕거렸는데, 공이 아주 명확하게 변론하여 의혹을 풀어주니 그제야 잠잠해졌다. 그 덕분에 남쪽 고을의 선비들이 미혹되지 않고 정학을 향해갈 수 있었다.
일찍이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선생에게 《주역》을 질의하였는데, 농암 선생이 공을 인정해 주었다. 또 공이 지은 장편 시에 대해 “창려(昌黎) 한유(韓愈) 선생의 작법을 체득하여 쉽게 얻을 수 없는 작품이다.”라고 하였다.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선생이 금강산과 설악산을 함께 유람하면서 주고받은 시가 많았는데, 공을 추중하여 맞수로 인정하였다. 또 공이 지은 가사(歌詞)를 보고는 고악부(古樂府)를 닮았다고 하였다. 일찍이 조정에 나갔을 때에 사관(史官)을 겸직하여 붓을 지니고 입시(入侍)하였는데, 임금께서 유달리 보고 진강(進講)을 명하였으며, 가상히 여기고 격려하여 품계를 더해 주었다. 그 뒤에 의망(擬望)할 때에 차례를 뛰어넘어 낙점을 받은 경우가 많았다.
공이 영남의 시험을 관장할 때에 공명정대하게 인재를 선발하였으므로 영남 사람들이 백 년 동안 보지 못했던 드문 일이라고 칭찬하였다. 네 고을을 역임하는 동안 청렴하고 엄하게 스스로를 다잡아 가렴주구하지 않았고, 어려운 사람들을 회생시키고 무지한 사람들을 일깨워서 명성이 자자하였다. 제주 목사로 있을 때에 기근이 들자, 구황에 힘써 제주도민 전체가 무사할 수 있었다. 사헌부 장령으로 있을 때에는 일체 법도를 준수하고 청탁을 들어주지 않았으므로 사납고 교활한 자들이 기가 꺾였다. 또 일찍이 글을 올려 진계(陳戒)하여 학문에 힘쓰고[懋學], 선비를 숭상하고[崇儒], 하늘을 공경하고[敬天], 재화를 넉넉히 마련하고[裕財], 변방을 튼튼히 하는[固圉] 등의 일에 대해 더욱 간곡한 뜻을 전하였다.
영조 임금 즉위년에 역적들이 형벌을 모면하자, 여론이 침울하였다. 공이 승지로 있으면서 입대(入對)하여 경서와 역사서의 내용을 끌어다가 거듭 아뢰었는데, 역적을 토죄하고 윤리를 밝히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당시 공의 말이 매우 명확하여 임금조차도 탈 잡을 수 없었다. 얼마 뒤에 흉악한 무리들이 다시 정권을 움켜쥐자, 탕평책을 명분으로 내세워 반대파들을 옭아매었다. 공은 당시 벼슬에서 물러나 있었는데, ‘풍유(諷喩)’라는 제목으로 글을 지어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는 문을 닫은 채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사람들과 교유하지 않았다.
공이 살던 서울의 북쪽 산 깊은 계곡에 가지와 줄기가 기이하고 고상하게 생긴 소나무 두 그루가 바위틈에 자생하였으므로 드디어 ‘송애(松崖)’ 두 글자를 바위 위에 새기고 뜻을 담았다. 공이 앞서 남쪽의 십묘동(十畆洞)에 살 때에 ‘뽕을 따는 사람이 한가하구나.[桑者閒閒](註2)라는 말에서 의미를 취하여 자호(自號)를 ‘상은(桑隱)’이라고 했었는데, 이때 호를 송애로 바꾸었다. 제주 목사를 지낼 때에 한라산의 마른 오동나무를 구하여 만들어 둔 거문고가 있었는데, 때때로 달밤에 그것을 타면서 흥을 실으니 한가로운 정취가 볼만하였다. 세상 사람들과 거의 십 년 동안 교유를 끊고 지내서 비록 번화한 저자에 살았지만 흡사 은둔한 선비 같았다. 사람들이 이따금 벼슬에 나아갈 것을 권유하면 대답 없이 웃기만 하고, 두문불출한 채 일생을 마쳤다.
아! 소나무란 것이 온갖 초목이 다투어 자라는 철에는 그리 대단해 보일 게 없지만, 서리와 눈이 내려 온갖 식물들이 시든 계절이 되면 그제야 변치 않는 자태를 알게 된다. 지금은 세상의 도가 매우 심하게 무너져서 더 이상 입에 올릴 만한 절개를 지닌 사대부가 없는데, 공만은 세속을 도외시한 채 고상하게 누워서 전날에 간직했던 소신을 잃지 않았으니, 그 당시 함께 어울렸던 빼어난 인물들이 공에게 부끄러움이 없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공은 진실로 소나무에 견줄 필요가 없고, 소나무가 필시 공을 만난 것을 기뻐하리라. 명은 다음과 같다.
그윽한 골짝 有窈然其谷
바위틈의 소나무 두 그루여 石上乎雙松
마음에 맞아 스스로를 비겼으니 自喩適志
아. 정옹이로다 吁嗟乎鄭翁
공의 지조를 드러내어 以颺其操
무덤에 게시하노라 以表揭乎幽宮
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 재을묘(再乙卯 1735, 영조11) 12월 11일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 겸(兼)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이의현(李宜顯) 짓다.
(註1).모의(毛義)가……때문이니 : 모의는 후한(後漢)의 효자이다. 집이 가난하고 어머니가 연로하였는데, 수령으로 삼는다는 격서가 오자 매우 기뻐하며 벼슬에 나아가니 사람들이 모두 천하게 여겼다. 그 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자 비로소 사람들은 그가 벼슬길에 나아간 것이 어머니를 위해서였지 일신의 영달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았다고 한다. 《後漢書 卷39 劉平等列傳》 공 또한 오로지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한 목적으로 과거급제를 원했다는 말이다.
(註2).뽕을 따는 사람이 한가하구나.[桑者閒閒]’ : 《시경(詩經)》 <위풍(魏風) 십묘지간(十畝之間)>에 나오는 말로, 나라의 정치가 혼란하여 어진 사람이 조정에서 벼슬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고 전원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는 내용이다. 뽕을 따는 사람의 한가로움을 부러워하는 시의 내용을 취하여 ‘상은(桑隱)’으로 자호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