左承旨公(諱必東)墓碑銘及自警文번역문(飜譯文)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증가선대부(贈嘉善大夫)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 홍문관제학 (吏曹參判兼同知經筵弘文館提學)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내가 젊어서 노봉(老峰 閔鼎重) 어른을 찾아뵈었더니 문하(門下)에 선비들이 매우 많았는데 정종지(鄭宗之)가 가장 추장(推獎)을 받아 심지어 종질녀(從姪女)를 아내로 삼아주려고까지 해서 내가 눈여겨 보았었다. 그후 유촌공(柳村公)을 찾아뵈었는데 그 장자(長子)가 바로 종지(宗之)였다. 그가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 법도가 있는 것을 보고서야 노봉 어른이 추장한 것이 까닭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 키가 7척(尺)이 못되지만 신채(神彩)가 영롱하고 담론(談論)이 시원시원 들을 만하여 종일 듣고 있어도 싫증을 느끼지 않게 하였다. 경사(經史)를 연구하여 해박 통쾌라고 나라의 고사(故事)와 다른 사람 집안의 보첩(譜牒)까지 관통하지 않음이 없어서 더욱 총명함이 짝이 없음을 알 수 있어서 함께 사귀면 사귈수록 더욱 감탄하게 되었다. 나중에 듣건대 유촌공의 병환이 위독해질 때 왼쪽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다가 마침내 손가락이 허벅지만큼 부어올라 거의 죽게 되었다가 다행히 살아났다고 하므로 그제야 전에 알고 있던 공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기사년 화(禍)에 노봉옹(老峰翁)이 서쪽 변방으로 귀양을 가자 천리 먼 길을 가서 시중을 들면서 화가 미칠까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상(喪)을 당해서는 부모님처럼 섬기는 의리로 하여 조금도 유감이 없게 하여 족히 옛날 중국 사람 형화숙(邢和叔)처럼 무너져가는 풍속을 경각시켰다고 할 수 있겠다. 세상의 오륭(汚隆)에 따라 진퇴(進退)가 구애를 받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왕직(枉直)에 따라 행동하지 않아서 대각(臺閣 사헌부)에 있으면서는 강직하게 바른 말을 하고 임금 가까이 있으면서 임금의 명령을 출납(出納)하면서는 현인(賢人)을 높이고 도(道)를 보위(保衛)함과 선인(善人)을 진출시키고 교회(敎誨)하려는 뜻이 장주(章奏 상소문) 사이에 넘쳤다. 또 일찍이 춘추(春秋)의 대경대법(大經大法)으로 지금 임금께서 대리(代理)하실 처음에 거듭 반복하여 면려(勉勵)하였으니 이런 사실은 온 조정이 다함께 아는 바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대왕(先大王)께서 자주 승정원(承政院)에 임명하여 매사를 물으시고 말년에는 총애하심이 예사롭지 않으셨으니 이상이 공에 대한 대략이다.

이동언(李東彦)의 문제에 이르러서는 공이 금산(錦山)에 재직할 때 공을 모략하던 자인데도 불구하고 억울하게 죽게 된 것을 보고 극력 구해주었으니, 그런 일을 어찌 사람마다 다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정자(程子)가 말씀하기를 “은혜와 원수를 분명하게 하라는 것[恩讎分明]이 덕 있는 사람의 말이 아니다.”라고 하셨으니 여기에서 더욱 공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당론(黨論)이 더욱 분파(分派)되고 헐뜯는 말이 세상에 넘쳤으니 통탄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속담에 ‘그 산을 보지 않고 그 나무를 보려고 한다’고 하는데 공 같은 분은 노봉옹이 자제처럼 보고 정능(靜能/閔鎭厚) 민성유(閔聖猷/閔鎭遠)가 스스로 ‘성(姓)만 다른 형제이다’ 라고 하였으며 농암(農巖) 김중화(金仲和 金昌協), 장암(丈巖) 정중순(鄭仲淳/鄭澔), 삼연(三淵) 김자익(金子益 金昌翕), 지촌(芝村) 이동보(李同甫) 상서(尙書) 김달보(金達甫), 상서 이사추(李士秋)가 모두 공과 친하게 지냈으니 다른 색목(色目)들이 헐뜯은 것이 공에게 손해될 게 무엇인가? 鄭仲淳(鄭澔)이 묘비명(墓碑銘)을 짓고 정능(靜能/閔鎭厚)이 묘지(墓誌)를 지어서 세계(世系)와 이력(履歷)이 자세히 실려 있다. 정능은 평소 사람을 허여함이 적었는데 그 지문(誌文)을 보면 맨 먼저 강직하고 청렴하다는 말로 공을 논했으니 이는 그가 기꺼이한 말이니, 그 누가 무슨 헐뜯는 말을 하겠는가? 삼운통고(三韻通考)에 이르러서는 공에게 있어서는 비록 여사(餘事)이지만 일찍이 나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니 역시 온축(蘊蓄)한 일단을 볼 수 있겠다.

또 상소문을 살펴보면 일찍이 정치에 대해 논하면서 군포(軍布)를 혁파해서 양민(良民)을 구제하고 대동(大同)을 감해서 한나라의 부세(賦稅)를 고르게 할 것이며 내수사(內需司)를 혁파해서 호조(戶曹)를 넉넉하게 하며 군포의 법을 혁파해 비용의 낭비를 줄이라고 하였으니 이모두가 오늘날 고쳐야 할 일들이었으니 어찌 그 말들이 노봉의 이론과 똑같았는가? 다만 훨훨 날지를 못해서 뜻을 다 펴지 못해 애석하다.

아, 잠깐 사이에 공의 무덤 풀이 두해나 묵었다. 평소의 일을 생각하니 슬프기 짝이 없다. 공의 여러 아들들이 공의 비문을 매우 간절하게 청하는데 내가 어찌 차마 사양하겠는가? 그러나 구순(九旬)을 바라보는 나이요 더군다나 병들어 곧 죽게 된 몸이어서 큰 글은 짓지 못하므로 간략하게 몇 마디 애도하는 뜻을 써서 비석에 새기게 하니 슬픈 일이다.

유촌공(柳村公)의 휘(諱)는 태구(台耈)니 세상에서 장자(長者)라고 일컬으며 공의 휘는 필동(必東)이요 자(字)는 종지(宗之)이다. 공은 세 아들을 두었으니 언회(彦恢) 언섭(彦燮) 언홥(彦煥)이다. 같은 방(榜)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그 진보함이 끝이 없으니 문호(門戶)의 번성함을 서서도 기다릴 수 있겠다.

                                                           안동(安東) 권상하(權尙夏) 지음

◎권상하(權尙夏)에 대하여

1641년(인조 19)∼1721년(경종 1).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치도(致道), 호는 수암(遂菴)‧한수재(寒水齋).

1. 黨爭과 處身.

서울 출신. 아버지는 집의 권격(權格)이며, 우참찬 권상유(權尙游)의 형이다. 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60년(현종 1)에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중, 1668년에 스승 송시열이 좌의정 허적(許積)과의 불화로 우의정을 사직하자 유임시킬 것을 상소하였다.

1674년(숙종 즉위)에는 앞서 1659년(효종 10)에 있었던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문제가 발생하여 송시열이 관작을 추탈당하고 덕원(德源)에 유배되는 한편, 남인이 정권을 전단하자 관계 진출을 단념하고 청풍의 산중에 은거하여 학문에 전념할 것을 결심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득세하여 송시열이 다시 제주에 위리안치되고 이어서 후명(後命)을 받게 되자, 유배지에 달려가 이별을 고하고 의복과 서적 등 유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송시열이 죽음에 임하여 남긴 유언에 따라 괴산 화양동(華陽洞)에 만동묘(萬東廟)와 대보단(大報壇)을 세워 명나라 신종(神宗: 임진왜란 때 군대를 파견하였음.)과 의종(毅宗: 나라가 망하자 자살함.)을 제향하였다. 숙종 재위 중에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고 그뒤 1689년에는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 1694년에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득세하는 등 서인과 남인간에 당쟁이 치열하였으나 이에 초연하고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그리하여 1703년 찬선, 이듬해 호조참판에 이어 1716년까지 13년간 해마다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며, 그밖에도 1705년 이조참판에 이어 찬선, 1712년에는 판윤에 이어 吏曹判書, 1717년 左贊成에 이어 右議政‧左議政, 1721년(경종 1) 判中樞府事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리고 나가지 않았다.

2. 畿湖學者의 繼承.

송시열의 제자 가운데 김창협(金昌協)‧윤증(尹拯) 등 출중한 자가 많았으나 스승의 학문과 학통을 계승하여 뒤에 ‘사문지적전(師門之嫡傳)’으로 불릴 정도로 송시열의 수제자가 되었으며, 그와같은 학문적인 위치로 인하여 정치의 소용돌이에 관련되기도 하였다.

1715년 《가례원류》의 저작권을 둘러싸고 윤선거(尹宣擧)와 유계(兪棨)의 후손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자, 그 서문에서 유계의 저술임을 밝혀 소론의 영수 윤증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또, 송시열이 화를 당한 것은 “윤증이 윤휴(尹鑴)의 무리와 함께 조작한 것”이라고 송시열의 비문에 기록하여 유생 유규(柳奎) 등 8백여명과 대사간 이관명(李觀命), 수찬 어유구(魚有龜) 등 소론측으로부터 비문을 수정하라는 항의를 받기도 하였다.

붕당기에 살면서도 정치현실보다는 서경덕(徐敬德)‧이황(李滉)‧기대승(奇大升)‧이이(李珥)‧성혼(成渾) 등 선유(先儒)들로부터 제기된 조선시대 성리학적 기본문제에 대하여 성리학 자체의 학적 체계나 논리적 일관성의 문제를 새로이 검토하여 보다 철저히 규명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16세기에 정립된 이황‧이이의 이론 중 이이‧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학통을 계승하고, 그의 문인들에 의해 전개되는 호락논변(湖洛論辨)을 학파적 성격으로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3. 禮學的 學問理論 活性化.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의 동이논쟁(同異論爭)인 호락논변이 제자 이간(李柬)과 한원진(韓元震)사이에 제기되자 ‘인성이 물성과 다른 것은 기(氣)의 국(局)이며, 인리(人理)가 곧 물리(物理)인 것은 이(理)의 통(通)이다. ’라고 한 이이의 이통기국이론(理通氣局理論)을 들어 전통적 기호학파의 학설로 한원진의 상이론(相異論)에 동조하였다.

인성‧물성의 상이론을 주장한 그 발상은 본성을 후천적인 것, 즉 기질의 다름에 따라 달리할 수 있는 것임을 주장하여 동물성으로부터 분별, 보호하려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본성의 문제를 물성과 관련하여 이해하려는 태도는 인성론이 자연물에까지 확대된 형이상학적 전개로서, 이황‧이이 이래 조선 성리학의 이론적 발전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17세기 이후 성리학이 예학(禮學)에 의하여 구체적인 사회규범으로서 경직되어가는 학문풍토에서, 인성‧물성 상이론의 제기는 예학적 학문이론을 활성화하고 심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하겠다.

이단하(李端夏)‧박세채(朴世采)‧김창협 등과 교유하였으며, 문하에서 배출된 특출한 제자로는 한원진‧이간‧윤봉구(尹鳳九)‧채지홍(蔡之洪)‧이이근(李頤根)‧현상벽(玄尙璧)‧최징후(崔徵厚)‧성만징(成晩徵) 등 이른바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가 있다. 글씨에 능하여 작품으로 〈기백이태연표(箕伯李泰淵表)〉‧〈형참권극화표(刑參權克和表)〉‧〈부사과이숙표(副司果李塾表)〉등이 전한다. 청풍의 황강서원(黃岡書院) 등 10여 곳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한수재집》‧《삼서집의(三書輯疑)》 등이 있는데 《한수재집》은 1979년 양장으로 영인, 간행되었으며, 가전되던 영정을 싣고 있다.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http://people.aks.ac.kr/

◎스스로를 경계하는 글[自警文]
1.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수신(修身)이 귀하다.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는 것이 큰일이요 기타 모든 행실 역시 삼가야 한다.
2. 동기(同氣)간은 부모님의 유체(遺體)요 부부간은 남녀 윤리의 시작이다. 한 밥상에서 먹고 한 이불을 덮으니 우애(友愛)하고 서로 공경하고 화합해야 한다.
3. 자녀에게 학문을 가르쳐 성취시키기를 기약해야 하고, 노복(奴僕)을 은혜로 부려 원망하지 않게 하라.
4. 아침과 저녁으로 사당(祠堂)을 참배하면서는 정성과 공경을 다하고 출입하면서 자신을 반성하며 항상 조심하라.
5. 벗은 반드시 단정한 자를 가려 오래 공경하고 사람을 공손하게 접대해서 한결같이 성심을 다하라.
6. 가난을 편안히 여기면 걱정할 일이 무엇이며 부자 되기를 원하지 않으면 무엇을 더 이상 바라겠는가. 부귀를 뜬구름처럼 여겨야 한다는 공자(孔子)의 가르침이 있다.
7. 음주(飮酒)를 좋아함은 몸을 해치는 방도요 색(色)을 좋아함은 몸을 상하는 도끼이다. 일절 통렬히 끊어서 그 싹을 남겨두지 말라.
8.다른 사람의 선행(善行)을 보면 드러내어주고 자신도 같게 하기를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보면 숨겨주고 자신을 반성하라.
9. 오직 자강(自强)하여 착수(着手) 노력하고 남마다 하는 행위를 밤마다 환히 드러내어 내 마음으로 하여금 욕심에 가리우지 말게 하고, 내 몸이 사역(使役)당하지 않게 하라.
10. 사람의 성품(性品)은 지극히 선(善)하고 마음은 허령(虛靈)하여 성인(聖人)이 되기 어렵지 않다. 성인이 되기를 바란다면 공자(孔子)의 제자 안연(顔淵)이 순(舜)임금처럼 되기를 바란 것을 나도 본받아서 항상 마음에 두고 노력하고 노력하라.
그 시(詩.)는 다음과 같다. 칠십여 세 주류노옹(周柳老翁)을 세상 사람들 헐뜯거나 칭찬하지 않네. 그가 힘들여 공부한 일을 보고자 하거든 내가 띠에 써서 보면서 경계한 참을 인(忍)자를 보라.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 전(前) 경주부윤(慶州府尹) 정공(鄭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