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절공 휘 갑손의 발자취
정절공 휘 갑손(甲孫)의 발자취
공은 동래(본관) 사람으로 판서 흠지(欽之) 공의 아들이며 영의정 창손(昌孫) 공의 형이다. 용모가 씩씩하고 뛰어나며, 키가 크고 윗수염과 구레나룻이 아름다웠으며, 도량이 넓고 넉넉하였다. 비록 몇 대에 걸쳐 재상을 지냈으나 맑고 가난하였으며, 외로운 절개가 있었고, 집에는 여축이 없었고 무명이불에 부들자리를 깔아도 편안하였었다.
의분에 복받쳐 곧은 말할 때에는 권세가도 피하지 않았으며, 가난하고 청렴하여, 겁쟁이처럼 벼슬하여도, 조정에서는 믿고 중하게 여겼었다. 대사헌 때, 이조에서 사람을 관에 앉히려고 잘못 천거하였었다. 상감께서 사정전(思政殿)에 납시어 평상시대로 상국 하연(河演, 1376-1453 1449 영의정)을 겸판서로 하고 최부(崔府, 1370-1452 조선조 문신. 1439 공조판서, 이조판서 다시 공조판서) 공을 판서로 하여 모두 입시하였을 때 공이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최부는 책망할 가치도 없거니와, 하연은 사리를 조금 아는데도 사람을 잘못 썼사오니 하연에게 벌을 내리소서.” 하니, 상감께서 기뻐서 웃으며 바깥뜰에 납시었다. 두 분(公)이 진땀을 흘리니 공이 빙그레 천천히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각각 그 맡은 직책을 다하려는 것이지 감히 해치려는 것이 아니오.” 하고, 드디어 녹사를 불러 “두 공께서 더위로 고생하니, 자네는 부채를 가지고 와서 부쳐드리게” 하고 온화한 얼굴로 스스로 만족하고, 조금도 후회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공께서 악을 물리치고 선을 선양하여 나라의 기강이 크게 떨쳤으나, 너그러워 큰 테두리는 옛 습관을 따랐다. 공께서 대간 모임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휘장을 쳐 자리를 마련하고 혹시 술을 마시고 휘장을 걷고 서로 술을 권하며 권장음(휘장을 걷고 마시라)이라 이름 지었다. 만약 금주 법에 해당되면, 대간이 법을 집행할 때는 마시지 않는 법인데, 간관은 술에 취하여 태연하였다. 하루는 간관이 술이 가득한 잔을 들고 장난으로 휘장 틈으로 대장(사헌부의 掌令과 持平)에게 보이니, 대장 역시 장난으로 소매를 가지고 이를 터니 잔이 휘장 틈에 맞고 둥글게 떨어져 구르며 헌장(憲長 대사헌) 상 앞에서 멈추니, 여러 대장들이 황공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대리(사헌부의 아전) 또한 서로 눈짓하나 감히 잔을 잡지를 못했다. 종일 어른 앞에서 대중(사헌부 안)에서 있으니, 일이 일어나거나 장차 벼슬이 끊어질 것을 두려워했다. 정절공이 관리들에게 말하였다. “저 거위 알 같은 것은 무엇이냐? 수정 구슬 몇 알을 넣을 수 있느냐?”하니 관리가 “백 알을 넣을 수 있습니다.”고 하여 정절공이 “좋다.” 꺼낼 수 있으면 꺼내어 휘장 틈 사이로 던지라“하니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그 아량에 탄복하였다.
간원에 전해오는 말에 잔의 모양이 거위 알 같고 한 되 가량 되는 수정 알을 담을 수 있으면 금한 법을 어긴 자가 없어졌다고 한다.
공은 성품이 맑고 곧으며 엄준하여, 자제가 사사로이 감히 범하지 못했다.
일찍이 함길도 감사가 되어 부름을 받고 서울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방에서 아들 우(俁)가 역시 합격한 것을 보고 공이 심히 노하여 시관을 꾸짖기를 “늙은 놈이 감히 나에게 아첨하려는가? 우리 아이는 아직 학업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어찌 요행수로 임금을 속일 수 있겠는가!” 드디어 이를 삭제하고 마침내 시험관을 내쫓았다.
공께서 대사헌이 되어 승려와 비구니는 옳지 않은 길로 세상을 홀리는 무리들이니 함부로 서울에 출입하지 못하게 하였고, 여러 차례 곧은 말로 상감께 아뢰어 조정안이 숙연하였다.

4) 어제(세종이 지으신) 6촌계 서문과 화수록

무릇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는 종족만한 것이 없다.
정으로 절로 서로 친하고, 의리로 마땅히 돈독해야 하며,
멀리하지 말고 서로 가까이 지내야 한다고
올바른 詩歌를 읊어 널리 펴치네
외로이 홀로 감을 시인은 깊이 슬퍼하니
진실로 혹시라도 서로 망설이더라도 은혜는 그칠 수 없다네.
칡이나 등나무처럼 환난이 뒤얽힐 때를 당하거든
유왕(幽王)처럼 골육(骨肉)을 멀리하고 간사한 이를 가까이 말거라.
환난을 서로 구하고 질병을 서로 견디어 내며,
길흉 영욕과 경조사를 때맞추어 하라.
만일에 서로의 운명을 어긴다면 하늘이 반드시 시틋히 여기리라.

세종대왕
대광보국숭록대부 효령대군 이보(李 補)
대광보국숭록대부 청평부원군 이백강(李伯剛) 정순(貞順) 공주에게 장가들다.
대광보국숭록대부 평양부원군 조대림(趙大臨) 정경(貞慶) 공주에게 장가들다.
숭록대부 의산군(宜山君) 남휘(南 暉) 정선(貞善) 공주에게 장가들다.
자헌대부 의정부 참찬으로 벼슬에서 물러나다 허 왕(許 )
통덕랑 주부 판관 민 폭(閔 輻)
전 통훈대부 경승부윤 민 식(閔 軾)
가정대부 한성부윤 노 한(盧 閈)
전 통덕랑 한성판관 김 양남(金陽南)
전 봉정대부 내섬소윤 봉 안국(奉安國)
중훈대부 동첨지돈녕부사 곽 혼(郭 渾)
전 수의부위 중군부사정 김 경순(金敬順)
전 선교랑 사헌부감찰 이 종인(李種仁)
선무랑 통례문 봉례 최 후(崔 厚)
유학(幼學) 민 추(閔 麤)
유학 노 물재(盧物才)
유학 이 긴(李 緊)
통선랑 예조정랑 정 갑손(鄭甲孫)
전 수의부위 좌군부사정 김 달근(金達根)
전 수의부위 중군부사정 곽 웅(郭 雄)
유학 곽 영(郭 永)
전 선무랑 통례문 봉례 민 신(閔 伸)
중좌위중령 사정 김 달원(金達源)
수의부위 좌군 문 치(文 致)
5) 문종(文宗)이 돌아간 좌참찬 정갑손(鄭甲孫)에게 내린
제문(문종실록) (賜祭 卒左參贊 鄭甲孫)

아! 경(卿)은 세상에 드문 어진 분으로
돌아가신 임금(세종) 때의 덕(德)이 높은 늙은 신하.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살릴 크나큰 인재로
올바른 학문으로 임금을 도왔네.
적절한 충성은
절로 타고난 것
일찍이 과거에 붙어
아름다운 소문 날로 드날렸네.
발탁하여 재능 시험해 보고
화려한 벼슬 연달으니,
있는 자리에서 이룩한 업적
칼날 놀리기 여유작작하였도다.
귀살쩍고 번거로운 일
시원스레 처리하여
두 번이나 사간원(司諫院)에 들어갔었네.
알면 꼭 말하였고
제 몸 잊고 나라 위해 바치었네.
위엄과 절개 고고하게 곧았으며
거푸 사헌부에 올랐었네.
조정의 기강은 떨쳐 엄숙하여졌고
올바름을 돕고 그릇됨은 멎었으니
옛날의 성현의 풍도 있는 정직한 사람이라.
돌아가신 임금께서 이를 가상하게 여겨
가려서 승정원을 맡게 하셨네.
넓게 흉금을 털어놓아
임금을 도와 선정을 베풀게 하였네.
삼도 관찰사로 나아가
소공(召公)같이 송옥(訟獄) 처결 덕화(德化)를 베풀었네.
나쁜 놈을 내치고 옳은이는 들어올리니,
완악하고 탐욕스런 놈은 자취를 감추었네.
경조판윤(서울시장)이 되매
학식에 견문, 판단력이 극히 밝았네
예조의 판서 되자
의례 법식 완성되어
실시토록 조처했네.
준엄한 명성 있어
참찬(參贊:정2품)이 도리를 따질 때면
임금의 직책을 도와
큰 띠를 드리우고 홀을 바로잡았네.
시대의 본보기라
만사 처리에 관습⋅율법 따져 해결하려 들 때는
나라를 위한 시초점⋅거북점 같았네.
내 이제 왕위를 맡음에
옛어른께 맡기려 별러
성공하길 기약하여
이로써 이 백성 구하려 하였더니만
하늘이 어찌 내키지 않았는가
어쩌자고 그리 급히 빼앗아갔는가?
부음을 들은 뒤로는
몹시도 슬프고 애달팠노라.
내가 내를 건너려는데
그 누가 배의 노를 저으랴?
본보기가 이제 없어졌으니
한숨지은들 부질없어라
이에 빈소에
이 한 잔을 올리니
넋이여 앎이 있다면
오히려 능히 받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