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훈부(忠勳府)와 중추부(中樞府)
□충훈부 [忠勳府] : ㉮.조선시대 정일품아문(正一品衙門)으로 공신(功臣)들의 관부(官府)이다. 중부 관인방(寬仁坊)에 있었다. 1392년(태조 1)에 설치한 공신도감(功臣都鑑)을 1414년(태종 14)에 충훈사(忠勳司)로 고쳤다가 세조 때에 충훈부(忠勳府)로 고친 것이다. 1894년(고종 31)에 기공국(紀功局)으로 고쳐 의정부(議政府)에 소속시켰다.
충훈부 관원으로 정일품인 부원군(府院君)은 정수(定數)는 없고 친공신(親功臣)인 보국승록대부(輔國崇祿大夫)나 왕비(王妃)의 아버지에게 예수(例授)하였으며, 종일품에서 종이품까지의 군(君)도 정수가 없었으며, 유사당상(有司堂上)은 3원(員)으로, 친공신이 없으면 승습(承襲)한 군(君)으로서 뽑아서 임명하였다. 경력(經歷: 從四品)은 초기에 두었다가 중기 이후 폐지하였고, 도사(都事: 從五品)는 1원으로 공신의 적장(嫡長)인 충의위(忠義衛)로서 6품 이상의 관직에 있는 자 중에서 차출하되, 대신당상(大臣堂上)이 있으면 자벽(自辟)하였으며, 겸도사(兼都事: 從五品)도 중기 이후 폐지되었다.
잡직(雜職)으로 가랑청(假郞廳)·약방(藥房)·녹사(錄事)가 각 1원씩 있었으며, 이속(吏屬)으로 서리(書吏) 6인, 고직(庫直) 7명, 사령(使令) 15명, 문서직(文書直) 1명, 군사(軍士) 4명, 방직(房直) 2명이 있었다.

㉯.개국 초에는 공신도감(功臣都監) ·충훈사(忠勳司) 등으로 부르다가 세조 때 이 이름으로 고쳐 당상관(堂上官)인 군(君)과 경력(經歷:종4품) ·도사(都事:종5품)의 관직을 설정하였다.
초기에는 당상관의 정원에 제한을 두지 않았으나 후기의 《대전통편(大典通編)》에 이르러 정원을 3명으로 정하고 친공신(親功臣)으로써 이를 임명하되, 친공신이 없으면 이를 승습(承襲)한 군(君)으로써 임명하는 한편, 경력의 관직은 폐지하고 도사(都事)는 공신의 자손을 등용하였다. 충훈부는 1894년 기공국(記功局)으로 개편하여 의정부에 소속시켰다
[출처] 충훈부 [忠勳府 ] | 네이버 백과사전

端宗 10卷, 2年(1454 甲戌 / 명 경태(景泰) 5年) 1月 15日(丁卯) 3번째기사 충훈사를 충훈부로 올려서 호칭하게 하다.
○議政府據禮曹呈及吏曹關啓曰: “忠勳司, 乃大君及府院君衙門, 不宜從祿官爲參外衙門。 請依駙馬府例, 陞號爲忠勳府, 依中樞院例, 置經歷、都事各一。” 從之。
의정부에서 예조의 정문(呈文)과 이조의 관문(關文)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충훈사(忠勳司)는 대군(大君)과 부원군(府院君)의 아문(衙門)이니, 녹관(祿官)을 종사시켜 참외(參外)아문(衙門)으로 만드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다. 청컨대 부마부(駙馬府)의 예에 의하여 충훈부(忠勳府)로 올려서 호칭하고, 중추원(中樞院)의 예에 의하여 경력(經歷)·도사(都事) 각각 1인을 두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중추부[中樞府] : ㉮.조선시대 정일품아문(正一品衙門)으로 관장하는 직무는 없고, 소임(所任)이 없는 문무 당상관을 우대하기 위한 관청이다. 1392년(태조 1)에 설치하였다가 1400년(정종 2)에 삼군부(三軍府)로 고쳤다가 이듬해 승추부(承樞府)로 되었다. 1405년 관제개혁 때 군정은 병조로 이속되고 왕명출납 기구로 승정원이 독립하여 왕명출납과 군사기능은 완전히 분리되었다. 1409년(태종 9)에 중추원으로 복구하였고, 1432년(세종 14)에는 중추원을 다시 세워 숙위와 경비업무만 관장하게 했다. 1466년(세조 12)에 중추부(中樞府)로 고쳐 문무(文武) 당상관으로서 임직(任職)이 없는 자를 일정한 사무를 맡기지 않고 우대하는 의미로 두게 되었다.
중추부(中樞府) 관원으로 영사(領事: 正一品) 1원, 판사(判事: 從一品) 2원, 지사(知事: 正二品) 6원, 동지사(同知事: 從二品) 8원, 첨지사(僉知事: 正三品) 8원, 경력(經歷: 從四品) 1원, 도사(都事: 從五品) 3원으로 되어 있다. 잡직(雜職)으로 약방(藥房) 1원과 녹사(錄事) 10원이 있었는데, 약방(藥房)은 의인(醫人)으로써 차출하였고, 녹사(錄事)는 서반(西班)의 각 아문에 분송(分送)하였으며, 이속(吏屬)으로 서리(書吏) 5인, 서사(書寫) 1인, 고직(庫直) 1명, 사령(使令) 8명, 군사(軍士) 5명이 있었다.
의정(議政)이 체직(遞職: 면직)되면 서반(西班: 中樞府)으로 보내어 영사(領事)와 판사(判事)의 정원수가 비록 찼더라도 모두 판사로 임명하였다. 지사(知事)와 동지사(同知事) 및 첨지사(僉知事) 등의 자리에 의관(醫官)·역관(譯官)이 왕명을 받아 임명되는 경우에는 30개월을 기한으로 하여 체직하였다. 동지사와 첨지사의 자리에 노인직(老人職)으로서 자급(資級: 官階)을 올려 임명하는 경우에는 3개월을 기한으로 하였다. 대신(大臣: 相臣, 三公) 이외에는 영사로 임명될 수 없고 총재(冢宰: 吏曹判書)와 종백(宗伯: 禮曹判書) 및 사마(司馬: 兵曹判書)를 거치지 아니한 사람은 판사에 임명될 수 없었다. 노인직인 자헌대부(資憲大夫)의 경우에는 문관·음관(蔭官)·무관을 막론하고 4품의 실직을 거치지 아니한 사람은 지사에 임명될 수 없었다. 백세 이상의 사람은 동지사에 정원 외로 자리를 더 만들어 단일 후보로 추천하여 임명하였다. 지사·동지사·첨지사가 정원 외로 가설된 경우에는 그 자리에 임명된 자는 1개월이 지나면 해임되었다.

㉯.1392년에 설치되었다. 관원으로는 판사(判事:정2품)·사(使)·지사(知事) 각 1명, 동지사(同知事) 4명, 첨사(僉事) 1명, 부사(副使) 6명, 학사(學士) 1명, 상의원사(商議院事) 3명(이상은 모두 종2품), 도승지(都承旨)·좌승지·우승지·좌부승지·우부승지(이상은 정3품) 각 1명, 당후관(堂後官:정7품) 2명, 연리(掾吏:7품관) 6명을 두었다. 중추원은 1400년(정종 2)에 삼군부(三軍府)로 고쳤다가 1409년(태종 9)에 중추원으로 복구하였으나, 1466년(세조 12) 중추부(中樞府)로 고쳐 문무(文武) 당상관으로서 임직(任職)이 없는 자를 일정한 사무를 맡기지 않고 우대하는 의미로 두게 되었다.
정원은 영사(領事:정1품) 1명, 판사(判事) 2명, 지사(知事) 2명, 동지사 7명, 첨지사(僉知事) 8명, 경력(經歷) 1명, 도사(都事) 1명을 두었으며, 경아전(京衙前)의 녹사(錄事) 4명, 서리(書吏) 6명이 이에 속했다. 그후에는 지사·동지사·첨지사 등의 공석(空席)이 나면 승전(承傳)한 의관(醫官)·역관(譯官)으로 충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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