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절공의 淸白한 言行

貞節公(諱 甲孫)의 淸白한 言行

『公職者를 爲한 名言錄(1980年 內務部 地方行政硏修院 發行)에서 轉載』

국가에서는 공무원 연수교재로 사용하기 위하여 조선의 청백리 215명중 특별히 선발한 8청에 공도 뽑혔는데 맹사성 박팽년 백인걸 이언적 유관 이원익 정갑손 황희등 8분의 행장을 「1980년 내무부지방행정연수원 발행」 『공직자를 위한 명언록』이라는 책자에 사표로 올려 공무원연수 교재로 사용하고 있다. 그중 공에 관한 기록을 전재(轉載)한다.

資料提供/文景公派宗中會

□ 정갑손(鄭甲孫)

정갑손(鄭甲孫)은 얼굴이 웅걸차고 키가 크며 수염이 아름다웠다. 기량(器量)은 넓었으나 성품이 강직해 곧은 말을 잘하며, 권세 있는 사람을 피하지 않았다.

그의 곧은 도리로 흔들리지 않는 늠름한 품절을 두고 사람들은 「홀로 치는 매」(獨擊鶻)라는 평을 했다.

정갑손은 동래 정씨로서 중추원사(中樞院使) 흠지(欽之)의 아들로 태여 났다. 자는 인중(仁仲)이다.

태종 17년(1417),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 부정자(承文院 副正字)에 이어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이 되었다.

감찰은 사헌부의 정 6품 벼슬로서, 조선왕조 초에는 25명을 두었으며, 세조이후 13명으로 줄었다.

정갑손이 부임하기 이전에 사헌부감찰들은 각도에서 보내오는 세납양곡들을 받아들이며, 계량을 해 우수리가 남으면 본부로 보내어, 술과 안주 값을 삼았다.

그러나 정갑손은 모두 사헌부 창고(國庫)에 넣어 버렸다. 동료들이 시비를 하면 그냥 웃으면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곧 다시 병조 좌랑(佐郞)이 되었다. 그는 거기서도 사사롭게는 지방의 말단 서기 한사람 쓰지 않았고 또 사사로운 청탁에 따라 군인사를 털끝만큼도 건드리지 않았다. 헌납(獻納), 지평(持平)등을 거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일에 임할 때 마다 아첨하는 일이 조금도 없이 곧은 말과 행동으로 뚫고 나갔다.

정갑손의 이와같은 성격은 주위에도 좋은 영향을 차츰 가저왔다. 탐욕스럽던 자들이 청렴한 것을 알게 되었고, 나약한 자들이 꿋꿋한 기상을 본받고자 하는 풍조가 생겼다.그의 평판은 날로 좋아졌으며 벼슬도 조금씩 올라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가 되었다.

그 무렵 세종이 그의 정직한 성격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는 1435년 좌승지에 발탁되었으며 지형조사(知刑曹事)에 올랐다.

그후 병으로 잠시 쉬었다가 중추원 부사(副使), 예조참판을 역임하고 세종 20년에 전라도 도관찰사(都觀察使)로 나갔다.

그 무렵 각궁과 종실의 종들이 왕실의 배경을 빙자하고 행패를 자심하게 부렸다. 그들은 백성의 집들을 몰래 빼앗아 갖기가 일쑤였으나 관청에서 그것을 금하지 못했다.

정갑손은 사실을 모조리 규명해 백성들의 재산을 다시 찿아 주고, 조정에 주청한 다음 괴수를 잡아 죽였다. 사람들이 모두 통쾌하게 생각했다.

얼마후 아버지의 상을 당해 벼슬을 그만두고 3년간 산소 옆에 묘막을 짓고 3(만 2년)년간 시묘(侍墓)를 했다. 그동안 한번도 집에 내려가지 않았다.

3년상을 마친후 1441년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그가 대사헌이 되면서 사헌부의 기강을 진작 시켰다. 국사에 불가한 일이 있으면 그 논박하는 어조가 추상같았다. 옳은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끝까지 버티며 물러서지 않았다. 한번은 겸판이조사(兼判吏曹事) 하연(河演)이 그의 인척인 윤삼산(尹三山)을 장령(掌令)에 제수케 한 일이 있었다. 정갑손은 하연을 탄핵 했는데 그 어세가 정승(겸직) 하연을 몹시 손상케 했다. 그것이 명제가 되어 정갑손은 의금부(義禁府)에 잡혀가 국문을 당했다. 그러나 대사헌 정갑손은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며 하연을 눈앞에 두고도 당당히 할 말을 했다. 의금부에서도 할 수 없이 풀어 내주고 말았다.

이조판서 최부(崔府)의 아들 최경신(崔敬身)은 통례에 따르면 수령을 시켜야 할 정도인데 전라도 경력(經歷-관찰사의 보좌상으로 부지사 격인데 실무를 대개 주관)을 제수 했다. 또 겸판사(兼判事) 최사강(崔士康)은 그의 아우 사용(士庸)을 부당하게 관직에 임명 했다.

어느날 세종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와 상참(常參=조정에서 매일하는 정예적인 조회)을 받을 때, 정갑손은 그 두 사람을 함께 탄핵했다. 인사행정을 맡은 자(吏曹判書) 자신이 정실인사를 저지른 것을 지탄한 것이다.

「사강은 학문이 없고 무식하므로 책할 것도 없사오나, 부(崔府)는 나이 70이 넘어, 전례에 따르면 당연히 치사(致仕 : 고령으로 자퇴)해야 할 것인데도 성은이 지극히 높아 인사행정(吏曹)을 맡기셧습니다. 그러하온데도 전력을 다하여 성은에 보답함이 없이 이 지경이오니 마땅히 죄를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의 말은 서릿발 같았다.

최부와 최사강의 등에서는 땀이 비오듯 했다.

세종은 분부를 내려 정갑손을 자리에 앉게 했다. 정갑손은 그러나 물러서지 않고 정논을 계속 폈다. 세종은 몸소 말했다.

「이는 내가 사람을 쓰는데 밝지 못하여 그러함이요. 나는 이를 매우 부끄러워하오.」

세종은 부드러운 얼굴로 양쪽을 화해 시켰다. 조회가 끝나고 물러나기에 앞서 회식을 하는데 최부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최부와 최사강은 밖으로 나왔을 때까지도 몸에서 땀이 물 흐르듯 했다. 그러나 정갑손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각기 제 직분을 다 했을 뿐이며, 서로 해치려 함은 아닙니다.」

그리고 곧 녹사를 불러서 일렀다.

「두 분이 몹시 더우신 모양이니 네가 부채를 가지고 와서 부쳐 드려라.」

정갑손은 조용한 태도로 조금도 후회 하거나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다.

정갑손의 그런 강직성은 정승 하연(河演)의 미움을 사서 경기도 관찰사, 이어 멀리 함길도(咸吉道) 관찰사로 나가게 되었다.

함길도 관찰사로 있을 때, 조정의 부름을 받아 서울을 다녀간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동안에 함길도 향시(鄕試-지방고시)가 있어 그 결과가 발표 되어 있다. 그리고 합격자 명단(榜)에는 정갑손의 아들 오(烏)가 들어 있었다. 그는 수염이 꼿꼿해 지며 화를 내었다. 그는 늙은 시관을 당장 불러 꾸짖었다.

※. 본문(本文)이나 실록(實錄)의 일부 기록(記錄)상 오(烏)는 우(俁)의 오기(誤記)로 판단(判斷) 된다.

「늙은것이 감히 나에게 아첨을 하느냐. 내 아들 오가 학업이 정진하지 못한데 어찌 요행으로 합격시켜 임금을 속이려 하느냐.」

그는 끝내 아들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시관을 파면 시켰다.

그러나 정갑손은 너그럽고 후한 면도 가지고 있었다.

사헌부와 사간원(司諫院) 사이에는 「권장음(捲帳飮)」이라는 것이 있었다.

공회(公會)가 열리면 사헌부와 사간원은 반드시 막차(幕次)가 이웃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양쪽 막차 간에 흑휘장을 걸고 술잔을 주고받는 일이 있었다. 그것이 「휘장을 걸고 마신다」는 「권장음」이었다.

만일 주금(酒禁-금주령)을 만나면 사헌부에서는 법을 잡고 있으므로 술을 마사지 않으나 사간원에서는 여전히 술을 마시고 취했다.

어느날, 관례대로 사간원의 간관 한사람이 술잔을 가득 부어서 장난 삼아 휘장 틈으로 대장(臺長=執義-종3품)에게 내밀어 보이는 것이었다. 대장 역시 장난삼아 옷소매로 술잔을 밀어 내었다. 그러자 술잔이 휘장틈으로 부터 떨어저 굴러서 공교롭게도 헌장(憲長=大司憲-종2품)의 책상앞에 가서 멈췄다. 대사헌은 바로 강직하고 꽃꽃한 정갑손 이었다.

대장(臺長)은 황공해서 어쩔줄을 모르고, 대리(臺吏=사헌부관리)들 또한 서로 처다보며 감히 얼른 치우지도 못했다. 술잔은 온종일 대사헌 책상앞에 있었고 온 대중(臺中)이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다. 대사헌은 내처 가만히 있었다.

이윽고 퇴근할 무렵이 되어 대사헌 정갑손은 술잔을 가리키며 아전에게 물었다.

「저 거위 알 같은 것이 무엇인고, 수정구슬이 몇 개나 들어갈 수 있을까.」

아전은 얼른 대답했다.

「백개는 들어갈 것 같습니다.」

정갑손은 다시 일렀다.

「그 들어 왔던 틈으로 던저 버려라.」

만좌가 모두 한숨을 내쉬며 정갑손의 아량을 탄복했다. 사간원에서 간관들이 금령을 어기고 만든 술잔을 부통 「아란배(鵝卵杯=거위알 술잔)」라고 했으며 수정구슬 1백개들이라고 일렀었다.

정갑손은 함길도 관찰사에서 돌와와 중추원사(中樞院使), 판한성부사(判漢城府使), 예조판서, 우참찬을 거처, 1450년(文宗 즉위) 좌참찬겸 판이조사(左參贊兼判吏曹事)가 되었다. 그리고 다음해에 죽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그렇게 많은 벼슬을 살면서도 집에는 재산이 없었으며 항상 베이불과 부들자리로 만족해했다. 시호(諡號)는 정절(貞節)공 이고, 나중 중중조(中宗朝)에 청백리(淸白吏)로 뽑혔다.

(歷代의 淸白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