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관향과지명유래

 

동래(東萊)관향(貫鄕)과동래지명의 유래

동래는 지금의 부산광역시 대부분.지역(김해군에서,편입된,지역 제외)과 경상남도 양산시 지역을 가르킨다.

❂서기757년(景德王16)전국에 9주를 두고 지명을 한자화 할 때 동래군(東萊郡)이 되었다.

삼국시대 이전에는 거칠산국(居漆山國)으로 있다가 그후 신라에 합병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동해연(東海縣)으로 되었다가 1547(조선 明宗2)에 동래부(東萊府)로 승격 되었다.

✿서기1895년 고종(32)에 동래관찰부(東萊觀察府)로 되었다가

✿서기1896년 동래군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서기1942년에는 대부분이 부산부(釜山府)로 편입되었고

✿서기1957년에는 동래군 마져 없어지고 부산시 동래구와 양산 군 지역으로 편입되었다.

❂화지산(華池山)은 그 이전에 이미 부산진구 양정1동으로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도시화 되어있으나 그 이전에는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기후는 따뜻하고 토질은 비옥하여 농경사회에서는 살기좋은 고장이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지역에 경주에 분파된 동래정씨가 뿌리를 내리게 된 바 그 경위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시조(始祖)의 동래 정착과 관향(貫鄕)유래

시조 회문(繪文)공의 동래정착에 대하여

✿금석집(金石集)에서는 서기927년 경애왕(景哀王4)11월에 견훤이 서라벌 경주를 급습함에 따라 아버님 완(琓)이 순절하고 가족이 해를 입어 혈혈단신으로 한 어린이가 거리를 방황하다가 이듬해인 928년 경순왕(景順王2) 당으로 가던 신라사신의 도움으로 동해에서 자라나고 만년에 안일호장이 되었다

✿고사촬요(攷史撮要)에는 어린 형제(繪文.宜卿)가 당으로 가던 신라 사신에게 구제되어 동래에서 자라난 형은 동래의 호장이 되고 아우는 연일로 옮겨가 그곳 호장이 되었다고 하였다.

✿후손이 번창하여 온 나라안에 퍼져 산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견훤이 난에 낙랑후(樂浪侯-지백호 智伯虎)의 33세손 병부완서 완(琓)공의 순절하고 그의 아드님께서 곤란을 격다가 928년 당으로 가던 신라사신의 도움으로 동래땅으로 옭겨져 여기서 정착하게 되었던 것이며 이에 따라 동래를 관향(貫鄕)시조의 고향,本貫이라고도 함)으로 삼아 오늘날까지 내려오게 되었던 것이다

신라는서기935년에 경순왕의 고려에 복숙함으로써 992년이라는 오랜 역사의 막을 내리게 된다.이에따라 회문공이 동래로 옮긴지 7년이 경과한 후에는 고려시대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견훤(甄萱)은 경북상주 태생으로 신라의 비장(裨將)으로 있었는데872년(眞聖女王6)에 반기를 들고 여러성을 공격하여 900년(孝恭王4)완산주(全州)를 도읍으로 정하고 국호를 백제(百齊)라 칭하였다 이를 편의상 후백제라 하며 견훤은 한때 그 세력이 강대하여 927년에 경주 포석정(鮑石亭)에서 연회를 열고 있던 경애왕을 공격하여 자살토록 하였다.

이 난리에 병무상서 완(琓)공의 순절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되었으며 견훤은 후에 고려에 항복하고 말았다

❂동래정씨의 시조가 기세조(起世祖)에 대한 정의

1.우리나라 정씨의 근원은 서기32년(新羅儒理王9壬辰)에 신라육부(6部)의 하나인 취산진지촌(?山珍支村)을 본피부로(本彼部)로 개칭하고 그 부장에게 鄭氏를 사성(賜姓)하니 이때부터 정씨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와 더불어 첫 촌장(村長)으로서 혁거세(赫居世)를 왕으로 받들어 신라를 건국하는데 좌명공신(佐命功臣)이었던 정씨의 비조(鼻祖)가 되는 지백호(智伯虎)에게는 낙랑후(樂浪侯)를 봉하였고 그 뒤 감문왕(甘文王)으로 추봉 되었다.

2.지백호(智伯虎)34세손 회문(繪文)공은 고려조때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역임하였으며 호장공을 동래정씨(東萊鄭氏)의 시조로 삼고 있다

3.동래정씨는 회문(繪文)공을 시조로 기세(起世)하여 왔으나 그 뒤4세(世)인문안공.항(文安公.沆)의 묘지석(墓誌石)이 1656~1659년 여간에 경기도 장단(長端)에서 발견되었으며 그 선대(先代)를 고(考)는 목(穆)이고 조(祖)는 문도(文道)이며 증조(曾祖)보윤호장공.지원(甫尹戶公.之遠)까지 3세(世)만 지석(誌石)에 적혀 있으므로 이에 따라 보윤호장 지원을 기세조(起世祖)1세조(一世祖)로 하고 시조는 회문 공으로 하였으나 그 사이에 계대(系代)는 분명치 않다 따라서 회문공의 원손(遠孫)으로 고려초엽 보윤호장(甫尹戶長)을 지낸 지원(之遠)공 부터는 세계(世系)가 확실하고 그 후 후손들이 많이 번성 하였으므로 세거지(世居地)인 동래를 본관(本貫.貫鄕)으로 정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