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정씨호장공지묘(東萊鄭氏戶長公之墓)

■東萊鄭氏戶長公之墓-(表石前面)

                                  陰記

公諱文道爲鄭氏二世葬在東萊華池山子坐原而其上世無文可徵至我 孝宗大王時長湍松林山下有古墓毁而幽誌出乃禮部尙書文安公鄭沆墓也有曰其先東萊人考諱穆攝太府卿祖諱文道曾祖諱之遠皆爲本郡戶長沆年二十三以高麗 肅宗壬午登科卒于 仁宗丙辰卽宋之紹與六年沆三兄濟早卒漸澤皆以文章材幹有名于朝云公之年代此可槩見謹追於表陰俾後有攷焉.

                    皇明崇禎甲申後五十八年辛巳冬至日二十代孫密陽府使是先改竪.

 

■동래정씨호장공지묘(東萊鄭氏戶長公之墓)-표석앞면(表石前面)

                                  음기(陰記)

공의 휘는 문도(文道)인데 정씨(鄭氏)의 이세(二世)로 장지는 동래화지산 자좌원(子坐原에) 있다. 그 상세(上世)는 징험(徵驗)할 만한 문적(文蹟)이 없었는데 우리 효종대왕(孝宗大王)때 장단(長湍)의 송림산(松林山) 아래에 파혜처진 옛 무덤에서 묘지(墓誌)가 나왔는데 바로 예부상서(禮部尙書) 문안공(文安公) 정항(鄭沆)의 무덤이었다. 거기에 말하기를 『선조는 동래인(東萊人)이요 아버지 휘 목(穆)은 태부경이요 할아버지 휘는 문도(文道)요 증조의 휘는 지원(之遠)인데 모두 본군(本郡)의 호장(戶長)을 지냈다.』 라고 하였다. 항은 나이 이십삼세 때인 고려(高麗) 숙종(肅宗) 임오년에 등과(登科)하고 인종(仁宗) 병진년인 송나라 소흥(紹興) 육년(六年)에 졸하였다. 항(沆)에게 세형이 있었는데 제(濟)는 일찍죽고 점(漸)과 택(澤)은 모두 문장(文章)을 잘 하고 재주가 있어 나라에 알려 졌다고 하였다. 공의 년대는 이에 대강 보이므로 삼가 추모(追慕)하여 비석을 세워 후일 참고 하도록 한다.

         황명(皇明) 숭정(崇禎) 갑신후오십팔년 신사 동짓날-(1701/辛巳 冬至日)

                                            이십대손 밀양부사 시선(是先) 고처세움.

 

□묘비이수사실(墓碑移竪事實)

서기 1975년(을묘년) 청명날 자손들의 염원이였던 안일호장공(安逸戶長公) 묘소의 사초를 봉행하기로 하고 경내에 묻혔던 비석을 살펴보니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인정되는 공의 16대손 남봉공(諱芝衍)께서 세우셨던 깨어진 비석(세우신 연대는 알수 없음)과 만력 41년(서기 1613년 이조 광해주5년 계축년)에 다시 세우신 비석(세우신 분은 알 수 없음)과 숭정 갑신후 58년(서기 1701년 이조 19대왕 숙종 27년 신사년)에 공의 20대손 감사공(諱是先)이 밀양부사로 계실 때에 고처 세우신 비석등 세가지의 비석이 있는바 이모두가 표면에는 『동래정씨시조호장정문도지묘(東萊鄭氏始祖戶長鄭文道之墓)』라고 새겨저 있었으며 감사공이 고처 세우신 비석에는 뒷면에 음기까지 새겨저 있기로 보첩과 선대문헌을 상고하여 보니 감사공께서 세우신 사실은 기록되어 있으나 그 외 두가지 비석에 대하여는 하등의 기록이 없어 고증의 자료가 없으므로 이 자리에는 감사공께서 고처 세우신 비석과 이제까지 묘 앞에 세워졌던 29대손 진영씨가 고처세운 비석을 음기의 잘못된 부분을 고처서 함께 옮겨 세웠으며 기록에 확실치 않은 두가지 비석은 이 자리 뒤쪽에 다시 묻었기로 이 모든 사실과 경위를 후일을 위하여 간단히 기술하는 바입니다.

                                             1975년 4월 6일(음력 을묘 2월 25일).

                                           동래정씨종약소장

                                                              공의 29대손 존수 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