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읍성 : 임진왜란 이후 부분 보수되어 온 성을 1731년(영조 7)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이 나라의 관문인 동래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과거의 성보다 훨씬 규모가 크게 고쳐 쌓았는데, 동래읍성 이 성이 현재 흔적으로 남아있는 읍성의 기원이다

 

 

 

 

                                       參判公(諱彦燮)의 墓所
◎정언섭(鄭彦爕)

1686(숙종12)~1748(영조24). 24世.

1.자(字)는 공리(公理), 광주부윤(廣州府尹) 필동(必東)의 아들. 권상하(權尙夏)의 문인(門人). 1717(숙종43)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725년(영조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이 되었다.

1727년에 정언(正言)이 되었으나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파직,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반란이 평정(平定)된 뒤에 지평(持平)으로 복직(復職) 되었다.

1729년 동래 부사(東萊 府使), 이어 충청도 관찰사(觀察使). 동부승지(同副承旨). 광주부윤(廣州府尹). 도승지(都承旨). 한성부 우윤(漢城府 右尹). 병조 참판(兵曹參判). 삼화 부윤(三和 府尹). 안변 부사(安邊 府使) 등을 역임, 호조(戶曹).예조(禮曹)의 참판을 지내고 1741년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 왔다. 글씨에도 능했다.

2.1717년(숙종43년)사마시(司馬試)을 거쳐 1725년(영조1)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성균관 전적으로 출사하여 사간원 정언에 이르렀다. 부정한 일에 참지 못하고 수만언(數萬言)에 소를 올려 그 부당함을 여러 차례 노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받아 파면되었으나,1728년(영조 4)청주(淸州)의 변(變)이 일어나자 영조가 그의 선경지명에 감복하여 지평(持平)으로 임명하였다.1729년에 동래부사로 부임하고 동래의 내주성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지난 140년만에 새롭게 수축(修築)하고. 부임 중 동래 화지산(東萊華池山)의 시조묘(始祖墓)정화작업을 하며 회문 호장공묘비도 건립해 오늘에 전해 보존되어 있고. 그후 호조(戶曹)와 형조(刑曹)의 참판(參判)에 올랐고 글씨와 문장도 뛰어났다.영조25년(1749)향년63세에 돌아가셨고 墓는 추주시(忠州市)이류면(利柳面)두정리(豆井里 山 45-1 파소에 모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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