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정씨 가문을 빛낸 문경공 후손
동래정래정씨는 고려-조선조에 걸쳐 400여 년이란 긴 세월 동안 가문의 번영을 누려
명문거족의 긍지를 살렸다.
문도의 아들 목은 고려 문종(文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상서 좌복야(상서 도성에 속하였던 정2품 벼슬)를 지냈고 슬하에 아들 제(濟)·점(漸)·택(澤)·항(沆) 4형제를 두었으며, 목의 아우 선조(先祚)는 호장(戶長)을 지냈고,그의 후손들이 동래(東萊)와 양산(梁山) 등지에 산거(散居)하면서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져왔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좌복야 목(穆)의 셋째 아들 택(澤)이 고려 때 찬성사(贊成事)를 지내고 문장(文章)과 재능(才能)으로 명망을 떨쳤으며, 그의 아우 항(沆)은 숙종(肅宗)때 등과 하여 우사간(右司諫)을쳐 양광도(楊廣道)와 충청도(忠淸道)의 안찰사(按察使)를 역임한 후 인종(仁宗) 때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예부상서(禮部尙書)·한림학사(翰林學士) 등을 지냈다.
인종비(仁宗妃) 공예대후(恭睿大后) 동생의 남편으로 문명(文名)을 떨쳤던 서(敍)는 의종(毅宗) 때 폐신(嬖臣)들의참소로 동래(東萊)에 유배되었는데, 그 곳에서 정자(亭子)를 짓고 오이를 심어 과정(瓜亭)이라 당호(堂號)를 삼고 군(戀君)의 정을 가요(歌謠)로 읊은 <정과정곡(鄭瓜亭曲)>을 지어, 우리 나라 국문학사(國文學史)에 빛나는 업적(業績)을 남겼다.

13세 때 진사(進士)가 되었던 흠지(欽之)는 양탁공(良度公) 양생(良生)의 손자(孫子)로 풍채가 좋고 성품이 강직했으며, 특히 사학(史學)과 천문학(天文學)에 정통하여 세종(世宗)의 명을 받아 역법(曆法)을 연구했고, 그의 아들 갑손(甲孫)과 창손(昌孫)이 크게 현달했다.

세종(世宗) 때 독격골(獨擊* )로 조정이 두려워하였던 갑손(甲孫)은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대강(臺綱)을 바로잡아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고 판한성 부사(判漢城府事)와 예조 판서(禮曹判書)·좌·우참찬(左·右參贊)을 지내고 중종(中宗)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필월잡기(筆苑雜記)」에 의하면 그의 성격이 청직(淸直)하고 엄준(嚴峻)하여 자제(子弟)들도 감히 사사로운 일로써 청탁을 못했다고 한다. 일찍이 함길도 감사(咸吉道監司)가 되었을 때 조정의 부름을 받아 한양(漢陽)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함길도 향시(鄕試)의 방(榜)이 발표되었음을 보니 그의 아들 오(烏)가 방에 들었으므로 시관(試官)을 불러 꾸짖기를 "늙은 것이 감히 나에게 아첨을 하느냐. 내 아들 오(烏)가 학업에 정진하지 못하거늘 어찌 요행으로 합격시켜 임금을 속이려 하느냐."하고 아들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시관을 파면시켰다고 한다. 「용재총화( *齋叢話)」에는 다음과 같이 그의 청렴 강개한 성품을 기록하고 있다. 그가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을 때 이조(吏曹)에서 사람을 벼슬에 잘못 임명한 일이 있었다. 세종(世宗)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와서 상참(常參: 조정에서 매일 정례적으로 행하는 조회)을 받을 때 정승 겸 판서 하 연(河 演)과 이조 판서 최 부(崔 府)가 함께 입시(入侍)하였더니 갑손이 왕에게 아뢰기를 "최 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하 연은 조금 사리를 알면서도 알맞지 못한 사람을 등용하였으니 국문(鞫問)하기를 청하옵니다." 하였다. 임금이 화한 얼굴로 양편을 화해시켰으나 조회가 끝난 뒤에 밖에 나와서 둘 다 땀이 물 흐르듯할 때 갑손이 웃으면서 "각기 제 직분을 다했을 뿐이니 서로 해침은 아닙니다."하며 녹사(錄事)를 불러서 "두분이 심히 더우신 모양이니 네가 부채를 가지고 와서 부쳐 드려라"하고는 조용한 태도로 조금도 후회하고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다고 한다.

갑손(甲孫)의 아우 창손(昌孫)은 세종 때 부제학(副堤學)으로 춘추관(春秋?)의 수찬관(修撰官)을 겸하여「고려사(高麗史)」와「세종실록(世宗實錄)」·「치평요람(治平要覽)」등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세조(世祖) 때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왕의 두터운 총애를 받았고, 세조가 신임하여 "내가 경을 공경하기를 숙부와 다름 없소"하면서 창손이 술을 권하면 반드시 어좌(御座)에서 내려앉았으며 술을 못 마시는 창손을 위하여 좌석에 반드시 단술을 준비케 하였다고 한다.

돌아갔고, 영남(嶺南)에서도 그의 부음(訃音)을 듣고 100여 명의 선비가 올라와 부조(扶助)만을 하고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직제학(直提學) 사(賜)의 아들이 성종조(成宗朝)의 명신(名臣) 난종(蘭宗)이다.「명신록(名臣錄)」에 의하면 그는 풍채가 아름답고 도량이 활달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