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 8권, 1년(1451 신미 / 명 경태(景泰) 2년) 6월 26일(계사) 7번째기사

▶의정부 좌참찬 정갑손의 졸기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 정갑손(鄭甲孫)이 졸(卒)하였다. 정갑손의 자(字)는 인중(仁仲)이고, 경상도 동래현(東萊縣) 사람으로 중추원 사(中樞院使) 정흠지(鄭欽之)의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영리하였고, 자라서는 학문이 날로 진취하였다. 영락(永樂) 2365) 정유년2366) 에 과거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보임(補任)되고, 여러 번 사헌 감찰(司憲監察)에 제배(除拜)되었다. 구례(舊例)로는 감찰이 제도(諸道)의 세량(稅糧)을 감납(監納)한 것에 남은 쌀이 있으면 본방(本房)으로 날라다가 주육비(酒肉費)로 삼았었는데, 정갑손이 다 대고(臺庫)2367) 에 들이므로 동료가 말하였으나, 다만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병조 좌랑(兵曹佐郞)으로 옮겨서는 사사로운 일로 한 구사(丘史)도 부린 적이 없고, 사사로운 청탁으로 군직(軍職)을 보임시키지 않았다. 헌납(獻納)·지평(持平)을 지냈는데, 매양 일을 당해서는 굽히지 않고 강직하게 감히 말하였다. 여러 번 벼슬을 옮겨서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가 되었는데, 세종(世宗)이 중히 여겨 동부대언(同副代言)으로 탁용(擢用)하였고, 좌승지(左承旨)·지형조사(知刑曹事)로 승서(陞敍)되었다가 병으로 사직(辭職)하여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로 제수(除授)되었고,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옮겼다가, 외직(外職)으로 나가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가 되었다. 본궁(本宮) 및 종실(宗室)의 노예(奴隷)가 흔히 거세고 방자하여 부정하게 민호(民戶)를 점탈(占奪)하나, 관가가 금하지 못하였었는데, 정갑손이 모두 밝혀 내어 다스리고, 조정에 청하여 그 괴수를 죽이니, 사람들이 모두 통쾌하다고 하였다.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여서는 거상하고 애통하기를 한결같이 《예경(禮經)》을 준수(遵守)하고 3년을 여묘(廬墓)살되, 한 번도 사제(私第)에 간 적이 없었다. 상기(喪期)를 마친 뒤에 대사헌(大司憲)에 제수되어서는 대강(臺綱)2368) 이 크게 진작(振作)되고 조정이 숙청(肅淸)되었다. 옳지 못한 일이 있으면 곧 논박(論駁)하되 말이 매우 적절하였고, 청한 일이 허락되지 못하면 그만두려 하지 않았다. 일찍이 세종(世宗)이 말하기를,

“근일에 일을 의논함은 옛날 대성(臺省)2369) 과 같지 않다.”

하였다. 겸 판이조사(兼判吏曹事) 하연(河演)이 그 사돈[姻親] 윤삼산(尹三山)을 벼슬시켜 장령(掌令)으로 삼았는데, 정갑손이 상소(上疏)하여 논핵(論劾)하되 말이 자못 하연을 침욕(侵辱)하였으므로 임금이 의금부(義禁府)에 명하여 국문(鞫問)하게 하였으나, 면질(面質)하기에 이르러 논변(論辨)이 갈수록 격절(激切)하여 잠시도 굽히지 아니하니, 드디어 풀어 주고 따지지 않았다. 또 이조 판서(吏曹判書) 최부(崔府)가 그 아들 최경신(崔敬身)이 으레 수령(守令)이 되어야 마땅한데도 전라도 경력 겸 판사(全羅道經歷兼判事)로 벼슬시키고, 최사강(崔士康)이 그 아우 최사용(崔士庸)을 벼슬시켰는데, 정갑손이 임금 앞에서 면척(面斥)하기를,

“최사강은 불학무지(不學無知)하므로 워낙 책망할 것도 없으나, 최부는 나이 70이 넘어 으레 치사(致仕)하여야 마땅한데도 성은(聖恩)이 지극히 융숭하여 전형(銓衡)을 맡기셨는데, 은혜에 보답하여 힘을 다할 생각을 아니하고 감히 이러하니, 죄 주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하니, 최부가 땀을 흘려 등을 적셨다. 임금이 타일러 자리에 앉게 하였으나, 더욱 논하여 마지 아니하니, 세종이 말하기를,

“이는 나의 사람 쓰는 것에 밝지 못한 허물이니, 내가 매우 부끄럽다.”

하였다. 물러가 회식(會食)할 적에 최부는 손이 떨려서 수저를 잡을 수 없었다. 정갑손은 승도(僧徒)를 몹시 미워하여 죄를 범한 자가 있으면 당장에 결단하여 모두 다스려서 용서하지 않고, 원적(元籍)으로 돌려보내며 말하기를,

“이들을 다스리기를 급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 조금이라도 늦추면 연고를 따라 일어날 것이다.”

하였다. 승도가 이로 말미암아 자취를 감추고 서울에 들어오지 못하니, 세종이 지극히 칭찬하여 말하기를, “근래 대성(臺省)이 한두 가지 자질구레한 일을 가지고 고사(故事)를 강구할 뿐이더니, 정갑손으로 말하면 참다운 대간(臺諫)이다.”

하였다. 이런 까닭에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으나, 단지 그의 소행이 흠이 없으므로 헐뜯지 못하였다. 하연에게 미움도 받아서 외직(外職)으로 나가 경기 도관찰사(京畿都觀察使)가 되었다. 또 함길도(咸吉道)로 옮기게 되니, 사람들이 모두 굽히리라고 생각하고, 또 늙은 어머니가 있으니 반드시 불평할 것이라고 하였으나, 정갑손은 태연하게 빨리 떠났다. 그때 동북면(東北面)이 매우 피폐하고, 또 흉년을 만나 저축[儲峙]도 다 없어졌는데, 정갑손이 여러 번 편의(便宜)를 베풀어 성심껏 구제하고 보살펴서 사람들이 다 보전해 살게 되니, 세종이 황정(荒政)2370) 을 잘하는 자를 일컬을 때마다 반드시 정갑손을 으뜸으로 삼았다. 갑자년2371) 겨울에 휴가를 청하여 서울에 오니 특별히 자헌 대부(資憲大夫) 중추원 사(中樞院使)를 제수하여 포상(褒賞)하고, 그대로 본직(本職)을 띠게 하였다. 이듬해 불리어 돌아와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가 되었는데, 송사가 지체되지 않고 법령이 행해지고 금령(禁令)이 엄해져서 간사하고 거센 자가 두려워 움츠렸으며, 승도(僧徒)와 음사(淫祀)2372) 를 금하는 것은 대성(臺省)에 있을 때와 같았다.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제수되었다가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으로 옮겼다. 소헌 왕후(昭憲王后)가 승하(昇遐)하여 대자암(大慈庵)에서 크게 불사(佛事)를 베푸니, 의정부에서 정갑손을 보내어 정파(停罷)하도록 계청(啓請)하게 하였는데, 매우 절직(切直)하므로 세종이 꾸짖었으나, 더욱 논청(論請)하여 마지아니하였다. 임금【문종(文宗).】이 즉위하여서 정헌 대부(正憲大夫) 좌참찬 겸 판이조사(左參贊兼判吏曹事)에 제수되었다. 명이 내린 날에 집에 축하하러 온 손이 없었으며, 전주(銓注)2373) 가 지극히 공정하므로 사람들이 은혜롭게 여기거나 원망하는 일이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병으로 눕게 되니, 임금이 자주 내의(內醫)를 보내어 문병을 하고, 또 계속 내선(內膳)을 내리었다. 병이 깊어지니 유언하여 상장(喪葬)은 되도록 검약(儉約)을 힘쓰고 불사(佛事)를 하지 말라 하였다. 임금에게 부문(訃聞)하게 되니, 애도(哀悼)하여 2일 동안 철조(輟朝)하고 부증(賻贈)에 특별히 더함이 있었다. 정절(貞節)이라 시호(諡號)를 내리니, 곧은 길로 흔들리지 않음이 정(貞)이요, 청렴을 좋아하여 욕심을 이김이 절(節)이다. 논의하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직도(直道) 두 글자에 염절(廉節)의 뜻이 이미 포함되어 있거니와, 다만 근학(勤學)의 뜻이 빠진 것이 한스럽다.”

하였다. 정갑손은 아름다운 풍자(風姿)에 타고난 자질(資質)이 뛰어나고 속에 품은 뜻이 쇄락(灑落)하며 마음이 맑고 곧고 평탄하였다. 남과 담소(談笑)할 때에는 온화하고 평이하여 정휴(町畦)2374) 가 없다가도, 큰 일을 논함에 이르러서는 절연(截然)2375) 하여 범할 수 없었다. 평생에 사사로운 일로 남에게 부탁하는 글을 보낸 적이 없었으며, 집이 가난하여 조석으로 끼니를 거의 이어가지 못하고, 또한 뚫어진 바람 벽과 떨어진 돗자리도 돌보지 못하면서도 태연하였으며, 또 자제(子弟)들을 위하여 벼슬을 구하지 않았다. 일찍이 함길도 관찰사로 있을 적에 부름을 받아 서울에 와 있는 사이에 그 아들이 본도의 생원 향시(生員鄕試)에 합격하였느데, 도(道)에 돌아가서 방목(榜目)을 보고는 기뻐하지 않고 말하기를,

“우리 아이는 학업이 아직 정(精)하지 못한데, 어찌 요행으로 임금을 속일 수 있겠느냐?”

하고, 곧 그 이름을 빼어 버렸다. 글 읽기를 좋아하여 공무(公務)로부터 물러나오면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대성(臺省)에 있을 때의 장소(章疏)는 다 스스로 지었는데 말하는 뜻이 격절(激切)하였으며, 의정부에 들어가서는 힘써 대체(大體)를 좇고 분경(紛更)2376) 을 즐기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끝내 시행할 수 없는 법을 세우는 것보다 세우지 않는 것이 낫다.”

하였다. 세종(世宗)의 상중(喪中)에 병이 심하여 음식을 먹지 못하므로, 그 어머니가 고깃국을 권하며 말하기를,

“친부모의 상중에도 병이 있으면 또한 고깃국을 자양(滋養)이 되도록 돕는 것을 허용하는 것인데, 이제 네가 병이 심한데도 어찌하여 변통하지 않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제가 재덕(才德)이 없이 지위가 이에 이르렀고, 우리 부자 형제(父子兄弟)가 두루 임금의 은혜를 입었으니, 살아서 조금도 보답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깁니다. 죽고 사는 것은 운명에 달려 있는 것이니, 고기를 먹고서 사는 것은 먹지 않고서 죽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또 그 아내가 병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기를,

“부인은 본디 기운이 약한데다가 이제 또 병이 있는데, 어찌하여 고기를 권하지 않는가?”

하니, 답하기를,

“그가 비록 부녀(婦女)이기는 하나, 관작(官爵)이 봉(封)해진 부인(夫人)이니, 성은(聖恩)이 막대한데, 어찌 고기를 먹을 수 있겠는가?”

하고, 듣지 않았다. 아우 정창손(鄭昌孫)이 그를 위한 제문에 이르기를,

“남들은 뜻이 있되 재주가 없음을 근심하나, 공(公)은 뜻도 있고 재주도 있으며, 남들은 말할 수 있되 행할 수 없음을 근심하나, 공은 말할 수도 있고 행할 수도 있었다. 공의 뜻으로 공의 재주를 행하면 넉넉히 왕화(王化)를 단청(丹靑)하고 일세(一世)를 도견(陶甄)2377) 할 수 있으므로 임금이 바야흐로 믿고 썼었는데, 공이 이미 돌아갔으니, 아아! 슬프다.”

하였는데, 세상 사람들이 지나친 칭찬이 아니라 하였다. 자식 둘이 있는데, 정우(鄭俁)와 정숙(鄭俶)이요, 딸은 자라서 후궁(後宮)에 들어가 소용(昭容)2378) 이 되었다.

【태백산사고본】 4책 8권 25장 B면

【영인본】 6책 407면

【분류】 *인물(人物) / *왕실-사급(賜給) / *왕실-의식(儀式) / *인사-관리(管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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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2365] 영락(永樂) : 명(明) 성조(成祖)의 연호(年號). ☞

[註 2366]정유년 : 1417 태종 17년. ☞

[註 2367]대고(臺庫) : 사헌부(司憲府)에서 중요한 문서(文書)나 물품(物品)을 보관하던 창고. ☞

[註 2368]대강(臺綱) : 사헌부(司憲府)의 기강(紀綱). ☞

[註 2369]대성(臺省) : 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을 아울러 일컫던 말. ☞

[註 2370]황정(荒政) : 기근(饑饉)을 구제하는 정사. ☞

[註 2371]갑자년 : 1444 세종 26년. ☞

[註 2372]음사(淫祀) : 옳지 못한 사신(邪神)에게 지내던 제사. 나라에서 이를 금지하였음. ☞

[註 2373]전주(銓注) : 전형(銓衡)하여 주천(注薦)함. ☞

[註 2374]정휴(町畦) : 구별이 분명하고 엄격함. ☞

[註 2375]절연(截然) : 사물의 구별이 칼로 자른듯이 확연한 모양. ☞

[註 2376]분경(紛更) : 방의 규범을 어지러이 고침. ☞

[註 2377]도견(陶甄) : 임금이 세상을 잘 제도하여 다스리는 것. 질그릇의 모양을 크고 작게 만드는 선반(旋盤)처럼 천하를 주름잡아 잘 다스리는 것을 말함. ☞

[註 2378]소용(昭容) : 내명부(內命婦)의 정3품의 품계. ☞

문종 8권, 1년(1451 신미 / 명 경태(景泰) 2년) 7월 10일(병오) 4번째기사

◎졸한 좌참찬 정갑손에게 사제하다.

졸(卒)한 좌참찬(左參贊) 정갑손(鄭甲孫)에게 사제(賜祭)하였는데, 그 제문(祭文)은 이러하였다.

“생각건대 경(卿)은 역대에 드문 현인(賢人)으로서 선조(先朝)의 덕망(德望) 있는 구신(舊臣)이요, 경제(經濟)2416) 의 큰 재목이라. 공정한 학식으로 보필(輔弼)하여, 충성이 절실함은 자연(自然)에서 얻은 것이었다. 젊어서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명성이 날로 퍼지고, 높은 관직(官職)을 역임(歷任)하니, 가는 곳마다 공적(功績)을 쌓고, 여유 있고 솜씨 있게 어려운 일을 처리하였다. 사간원에 두 번 들어가서는 알고서 말하지 않는 일이 없었고, 몸을 잊고 나라를 받드니 기개가 뛰어났다. 사헌부[鳥府]에 여러 번 오르니, 조정(朝廷)의 기강(紀綱)이 떨쳐 엄숙해지고, 바른 것을 붙들어 세우고 사악(邪惡)을 그치게 하니, 옛 곧은 이의 유풍(遺風)인 것이다. 선왕(先王)이 아름답게 여겨 뽑아서 후설(喉舌)2417) 을 맡기시니, 계옥(啓沃)2418) 이 매우 많아 염매(鹽梅)·국얼(麴糱)2419) 이었다. 삼도(三道)로 남비(攬轡)2420) 하여 당발(棠茇)2421) 에서 선화(宣化)2422) 하되, 그늘진 것을 물리치고 광명한 것을 앞세우니, 완악(頑惡)하고 탐욕(貪慾)스러운 자가 자취를 끊었다.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가 되어서는 판결[鑑裁]이 아주 밝았고, 예조 판서(禮曹判書)가 되어서는 예(禮)를 맡아서 이룩하였으니, 설계와 시행을 조치(措置)함에 높은 명성이 있었다. 참찬(參贊)2423) 하고 논도(論道)하여 곤직(袞職)2424) 을 돕고, 신(紳)을 드리우고 홀(笏)을 바르게 잡아 당시의 모범[表儀]이 되고, 일을 처리함에 의혹(疑惑)을 결단함은 나라의 시귀(蓍龜)2425) 가 되었다. 이제 내가 보위(寶位)를 이으니 구인(舊人)2426) 을 도임(圖任)하여 성공을 기다리어 백성을 구제하기를 바랐더니, 하늘이 어찌하여 계칙(戒飭)하지 아니하고 빨리 빼앗아 가는가? 부음(訃音)을 알리고 돌아가니, 깊이 통탄하고 애석하다. 내가 만일 내[川]를 건너게 되면 누가 주접(舟楫)2427) 이 될 것인가? 이제 보니 가고 없으니 한탄하여도 어쩔 수 없다. 이에 빈당(殯堂)에 한 잔을 올리니, 영(靈)이 밝거든 흠향(歆享)하라.”

【태백산사고본】 4책 8권 32장 A면

【영인본】 6책 410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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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2416]경제(經濟) : 나라를 경륜하고 백성을 구제함. ☞

[註 2417]후설(喉舌) : 승지(承旨)의 직임. ☞

[註 2418]계옥(啓沃) : 신하가 마음에 있는 것을 임금에게 아뢰어 덕(德)을 넉넉하게 하던 일. 《서경(書經)》 열명(說命) 상(上)에 “너의 마음을 열어서 나의 마음을 넉넉하게 하라.[啓乃心沃肢心]”라고 하였음. ☞

[註 2419]염매(鹽梅)·국얼(麴糱) : 염매는 소금과 오매(烏梅)이요, 국얼은 쓴 누룩과 단 누룩을 말하는데, 염매로써 국의 간을 맞추고, 국얼로써 술의 맛을 조절하는 뜻에서, 신하가 임금을 도와서 적당하고 알맞은 정치를 함을 일컫는 말. ☞

[註 2420]남비(攬轡) : 말의 고삐를 잡는 것. 곧 임지(任地)를 떠나는 것을 말함. ☞

[註 2421]당발(棠茇) : 당은 아가위 나무, 발은 초사(草舍), 주(周)나라의 소백(召伯)이 아가위 나무 밑에서 정사를 행한 데에서 나온 말로써, 여기서는 감사의 감영(監營)을 말함. ☞

[註 2422]선화(宣化) : 선정(善政)을 아래에 배풂. ☞

[註 2423]참찬(參贊) : 대정(大政)에 참여하여 도움. ☞

[註 2424]곤직(袞職) : 임금의 직. ☞

[註 2425]시귀(蓍龜) : 점을 치는 데 쓰이는 시초(蓍草)와 거북의 껍질. 나라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함을 말함. ☞

[註 2426]구인(舊人) : 선대부터의 오랜 신하. ☞

[註 2427]주접(舟楫) : 배와 돛대. 곧 중요한 일을 함. ☞

 

문종 8권, 1년(1451 신미 / 명 경태(景泰) 2년) 7월 16일(임자) 7번째기사

◎동궁이 졸한 좌빈객 정갑손을 치제하다

동궁(東宮)이 졸(卒)한 좌빈객(左賓客) 정갑손(鄭甲孫)을 치제(致祭)하였는데, 그 제문은 이러하였다.

“생각건대 공은 품자(稟資)가 청수(淸粹)하고 제행(制行)이 정강(貞剛)하며, 재주는 경제(經濟)에 넉넉하고 명망은 조정[巖廓]에 무거웠다. 내가 아직 어려서 학문에 종사할 때에 공이 빈연(賓筵)2438) 에 있어 보도(輔導)가 참으로 지극하여, 밝은 가르침을 공경히 받아 성공 있기를 바랐더니, 하늘이 어찌하여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문득 의형(儀刑)2439) 을 잃게 하는가? 부음(訃音)이 들리고 돌아가니 참으로 마음이 측은하다. 이제 궁관(宮官)을 보내어 한 잔을 베푸니, 영령(英靈)이 어둡지 않거든 흠향(歆享)하라.”

【태백산사고본】 4책 8권 35장 B면

【영인본】 6책 411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어문학(語文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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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2438]빈연(賓筵) : 세자가 학문하는 자리. ☞

[註 2439]의형(儀刑) : 모범, 그러한 사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