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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정씨 14세 정절공(貞節公) 휘(諱) 갑손(甲孫) 묘소
配 정경부인(貞敬夫人) 강릉김씨(江陵金氏) 합부 소재지 :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 99번지

▶ 券之三 정절공집(貞節公集)
공(公)의 휘(諱)는 갑손(甲孫)이요 자(字)는 인중(仁仲)이며 시호(諡號)는 정절(貞節)인데 1396년(태조 5년 병자)에 문경공(文景公) 휘(諱) 흠지(欽之)의 여섯 아들 중 장남(長男)으로 태어나 1417년(태종 17년 정유)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던 중 강직(剛直)한 성품이 세종(世宗)의 신임을 받아 좌승지로 발탁된 뒤 1441년(세종 23년 신유) 대사헌이 되어 대강(臺綱)을 바로 잡아 조야(朝野)가 숙연(肅然)해 지고 경기도와 함길도 도관찰(都觀察) 중추원사(中樞院使)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예조판서(禮曹判書) 우참찬(右參贊)을 거쳐 1450년(문종 즉위 경오) 좌참찬 겸 판이조판사가 되었으나 1451년(문종 1년 신미) 6월 26일에 졸(卒)하니 좌찬성으로 추증되고 중종시(中宗時) 청백리(淸白吏)에 록선(錄選)되었다. 공(公)이 함길도관찰사 당시 아들 우(俁)가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한 사실을 알고 시관(試官)을 불러 꾸짖기를 늙은 놈이 여우같이 아첨하는가 우리 아이 우(俁)는 학업이 정밀(精密)하지 못한데 어찌 요행(僥倖)으로 임금을 속이려 하는가 하고 아들의 이름을 지워 버리고 결국 시관(試官)을 내 쫓았다. 이같은 사실을 귀감으로 삼기 위하여 내무부지방행정연수원 교재(敎材)로 활용하고 있다.
▶ 정절공 묘비명
正憲大夫 議政府左參贊 修文殿大提學 兼 判吏曹事 世子左賓客 贈議政府左贊成 諡貞節 東萊鄭公 墓碑銘 幷序
淸白一生 垂範千秋 天下後世 萬人仰慕 其身雖沒而魂不滅者 貞節鄭公 卽其人也 公諱甲孫 字仁仲系出東萊 曾祖諱良生 重大匡蓬原君 祖諱符 嘉善大夫漢城府尹 贈議政府左贊成 考諱欽之 資憲大夫中樞院使 諡文景 贈純忠積德補祚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 萊山府院君 妣貞敬大夫人全州崔氏 刑曹典書丙禮之女 以洪武二十九年丙子某月日生公 生而穎悟 及長學日就 永樂丁酉登第 補承文院副正字 累拜司憲監察 遷兵曹佐郞 未嘗以私事役一丘史 又不以私謁補軍職 歷獻納持平 每遇事不阿 剛直敢言 累遷至知承文院事 世宗大王器之 擢同副代言 陞左承旨知刑曹事 以疾辭 授中樞院副使移禮曹參判 出爲全羅道都觀察使 本宮及宗室奴隸 多豪橫自恣 影占民戶 官不能禁 公悉究治之 請于朝 戮其魁人 皆稱快 己未丁父憂 廬墓三年 未嘗一至私第 服闋 拜大司憲 大振臺綱 朝著肅淸 時吏判之子 例當爲守令 除拜經歷 公於上前面斥其人 請罪 世宗曰 是予用人不明之過 予甚慙焉 公惡僧徒尤甚 治之益急 僧徒由是屛迹 不得入京都世宗亟稱之曰 比來臺省 不過以一二細琑事 講故事耳 至如甲孫眞臺諫也 以故不悅者多但其所行無缺 故不能間 然爲執政所惡 出爲京畿都觀察使 移咸吉道 人皆謂必不平 公怡然亟行 時東北甚凋弊 且遭凶歉 公屢陳便宜 盡心賙恤 人賴全活 世宗每稱善荒政者必以公爲首 甲子冬 請暇來京 特授資憲中樞院使以褒之 仍帶本職 明年召還判漢城府事辭訟無滯 令行禁嚴 姦豪畏縮 禁僧徒淫祀 如在臺時 拜禮曹判書 轉議政府右參贊 昭憲王后昇遐 大設佛事 政府遣公 啓請停罷 言甚切直 世宗詰之 逾論請不已 文宗大王卽位拜正憲左參贊兼判吏曹事 命下之日 門無賀客 銓注至公 人無恩怨 至是寢疾 疾革遺命喪葬務從儉約 不作佛事 景泰二年辛未六月癸巳卒 賜謚貞節 葬于楊州豊壤蜂峴先塋 享年五十有六 景泰六年 以靖難原從勳三等追贈一資 正德九年 以左議政鄭光弼之薦錄選淸白吏 公娶持平金揚尙之女 生二男八女 長曰俁都事 次曰俶牧使 女長入後宮爲昭容次適李重元 次趙怡府使 次李恂 次安從道郡守 次權祿署令 次安信直長 次蔡允恭僉正內外孫不盡記 公美風姿 天資卓越 胸懷灑落 淸直坦夷 平生未嘗以私事投簡於人 家貧朝夕幾不繼亦不恤 穿壁弊席宴如也 又不爲子弟求官 嘗爲咸吉道觀察使 被召來京 其子中本道生員鄕試 及還道見牓目 卽句去其名 及入政府 務尊大體 不喜紛更 嘗曰 與其立終不可行之法 不如不立 世宗之喪 病劇不能食飮 公之母勸肉汁 對曰 吾父子兄弟 偏蒙上恩 恨生平無少報 死生有命 食肉而生 不如不食而死 公沒 公之弟昌孫有誄曰 以公之志 行公之才 足以丹靑王化 陶甄一世 文宗賜祭公之文曰 忘身奉國 風節孤騫 垂紳正笏時之表儀 處事決疑 爲國蓍龜 近年公入淸白吏中淸白吏八人選 以爲國家之模楷矣 公雖沒世 後人不忘於心 此可謂身沒魂不滅者 則百代永傳 愈久而愈光者乎 銘曰淸白垂範 貞節鄭公 世宗盛世 君臣和衷 一私不行 剛直盡忠 南道橫恣 一治有功 在臺振綱 君亦慙愧 觀察北道 荒政善治 令行禁嚴 判事京師 長銓拜命 賀客有誰 銓注至公人無怨斯 爲子求官 何嘗一思 旣中鄕試 際名勿施 君喪食肉 死且不爲 忘身奉國 爲國蓍龜 古今師表 沒世不忘 百代永傳 愈久愈光
二千九年春分節 淸州 李忠九 謹撰.
역문(譯文)
정헌대부 의정부좌참찬 수문전대제학 겸 판이조사 세자좌빈객 증의정부좌찬성 시정절 동래정공묘비명 병서
청백하게 한 평생을 살아 천추에 모범을 내려서 온 세상과 후세에 많은 사람들이 앙모하는 것은 그 몸이 비록 죽었을지라도 혼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니, 정절(貞節) 정공(鄭公)이 바로 그 사람이다. 공은 이름이 갑손(甲孫)이고 자는 인중(仁仲)이며 계통은 동래(東萊)에서 나왔다. 증조는 이름이 양생(良生)으로 중대광(重大匡) 봉원군(蓬原君)이고, 할아버지는 이름이 부(符)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부윤(漢城府尹) 증의정부 좌찬성(贈議政府左贊成)이고, 아버지는 이름이 흠지(欽之)로 자헌대부(資憲大夫) 중추원사(中樞院使) 시(諡) 문경(文景) 증순충적덕보조공신(贈純忠積德補祚功臣) 중추원사(中樞院使) 시(諡) 문경(文景) 증순충적덕보조공신(贈純忠積德補祚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내산부원군(萊山府院君)이다. 어머니는 정경대부인(貞敬大夫人) 전주최씨(全州崔氏)로 형조전서(刑曹典書) 병례(丙禮)의 딸인데, 홍무(洪武) 29년 병자년(1396) ○월 ○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나면서부터 영리하였고, 자라서는 학문이 날로 진취하였다. 영락(永樂) 정유년(1417)에 과거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임명되고, 여러 번 옮겨서 사헌감찰(司憲監察)에 임명되었다. 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 옮겨서는 사사로운 일로 한 명의 구사(丘史 : 하인)도 부린 적이 없고, 또 사사로운 청탁으로 군직(軍職)을 보임시키지도 않았다. 헌납(獻納)·지평(持平)을 지냈는데, 일을 만날 때마다 아첨하지 않고 강직하게 감히 말하였다. 여러 번 옮겨서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가 되었는데, 세종대왕(世宗大王)이 소중히 여겨 동부대언(同副代言)으로 발탁하였고, 좌승지(左承旨)·지형조사(知刑曹事)로 승진되었다가 병으로 사직하여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 임명되었고,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 옮겼다가, 외직(外職)으로 나가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가 되었다. 본궁(本宮) 및 종실(宗室)의 하인들이 흔히 거세고 방자하여 백성의 집을 강제 점령하였으나 관청에서 금하지 못하였는데, 공이 모두 밝혀내어 다스리고, 조정에 청하여 그 괴수를 죽이니, 사람들이 모두 통쾌하다고 하였다. 기미년(1439)에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여서는 시묘살이 3년을 하면서 한 번도 자기 집에 간 적이 없었다.
상복을 벗자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어서는 사헌부(司憲府)의 기강을 크게 진작시켜서 조정이 깨끗해졌다. 당시 이조판서(吏曹判書)의 아들이 규례에 당연히 수령에 임명되는 것이어서 경력(經歷)에 임명되었는데 공은 세종의 앞에서 맞대고 그 사람을 배척하여 죄를 요청하자, 세종이 말하기를, "이는 나의 사람 스는 것에 밝지 못한 허물이니, 내가 매우 부끄럽다."하였다. 공은 승도(僧徒)를 몹시 미워하여 다스리기를 더욱 급히 하자, 승도가 이로 말미암아 자취를 감추고 서울에 들어오지 못하니, 세종이 자주 칭찬하여 말하기를, "근래 대성(臺省 : 사헌부와 사간원)이 한 두 가지 자질구레한 일을 가지고 옛 일을 강구할 뿐이더니, 정갑손과 같은 경우에 있어서는 진정한 대간(臺諫)이다."하였다. 이런 까닭에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으나, 단지 그의 행하는 것이 흠이 없으므로 헐뜯지 못하였다.
그러나 정권을 잡은 이에게 미움을 받아서 외직(外職)으로 나가 경기도관찰사(京畿都觀察使)가 되고, 또 함길도(咸吉道)로 옮기게 되었다. 사람들이 모두 반드시 불평할 것이라고 하였으나, 공은 유쾌하게 빨리 떠났다. 그때 동북면(東北面)이 매우 피폐하고, 또 흉년을 만났는데, 공이 여러 번 편의함을 베풀어 성심껏 구제하고 보살펴서 사람들이 다 보전해 살게 되니, 세종이 황정(荒政 : 기근을 구제하는 정무)을 잘하는 자를 일컬을 때마다 반드시 공을 으뜸으로 삼았다. 갑자년(1444) 겨울에 휴가를 청하여 서울에 오자, 특별히 자헌대부(資憲大夫) 중추원사(中樞院使)를 임명하여 포상하고, 그대로 본직(本職)을 띠게 하였다.
이듬해 불리어 돌아와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가 되었는데, 송사가 지체되지 않고 법령이 시행되고 금령(禁令)이 엄해서 간사하고 거센 자가 두려워 움츠렸으며, 승도(僧徒)와 음사(淫祀 : 옳지 않은 제사)를 금하는 것은 대성(臺省)에 있을 때와 같았다.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제수되었다가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으로 옮겼다.
소헌왕후(昭憲王后)가 돌아가서 크게 불사(佛事)를 베푸니, 의정부에서 공을 보내어 그만두게 말씀드리도록 하였는데, 매우 절실히 곧으므로 세종이 꾸짖었으나, 더욱 논설해 청하여 마지아니하였다. 문종대왕(文宗大王)이 즉위하여 정헌대부(正憲大夫) 좌참찬 겸 판이조사(左參贊兼判吏曹事)에 임명되었다. 임명이 내린 날에 집에 축하하러 온 손님이 없었으며, 인사 행정이 지극히 공정하므로 사람들이 은혜롭게 여기거나 원망하는 것이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병으로 눕게 되고, 병이 깊어지자 유언하여 상례의 장사지내는 것은 되도록 검소함을 힘쓰고 불교(佛敎) 의식을 하지 말라고 하였다. 경태(景泰) 2년 신미년(1451) 6월 계사일에 돌아가자, 시호(諡號)를 정절(貞節)이라 내렸다. 양주(楊州) 풍양(豊壤) 봉현(蜂峴) 선영(先塋)에 장사지냈는데 누린 나이는 56세였다.
경태 6년(1455)에 정난원종훈(靖難原從勳) 3등으로 1계급을 추증하였다. 정덕(正德) 9년(1514)에 좌의정(左議政) 정광필(鄭光弼)의 추천으로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공은 지평(持平) 김양상(金揚尙)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8녀를 낳았다. 맏이는 우(俁)로 도사(都事)이고, 다음은 숙(俶)으로 목사(牧使)이다. 딸의 맏이는 후궁(後宮)으로 대궐에 들어가 소용(昭容 : 내명부의 정3품의 품계)이 되고, 다음은 이중원(李重元)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부사(府使) 조이(趙怡)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이순(李恂)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군수(郡守) 안종도(安從道)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서령(署令) 권록(權祿)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직장(直長) 안신(安信)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첨정(簽正) 채윤공(蔡允恭)에게 시집갔다. 친손과 외손을 다 기록할 수는 없다.
공은 아름다운 풍모에 타고난 바탕이 뛰어나고 속에 품은 뜻이 깨끗하고 맑으며 곧고 평탄하였다. 평생에 사사로운 일로 남에게 부탁하는 글을 보낸 적이 없었으며, 집이 가난하여 조석으로 끼니를 거의 이어가지 못해도 근심하지 않았고, 도한 둟어진 벽과 떨어진 돗자리도 편안해하였으며, 또 자제(子弟)들을 위하여 벼슬을 구하지 않았다. 일찍이 함길도 관찰사로 있을 적에 부름을 받아 서울에 와 있는데 그 아들이 본도의 생원 향시(生員鄕試)에 합격하였다. 도(道)에 돌아가게 되어 합격자 발표를 보고는 기뻐하지 않고 즉시 그 이름을 빼어 버렸다. 의정부에 들어가서는 힘써 대체(大體)를 쫓고 어지러이 고치기를 즐기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끝내 시행할 수 없는 법을 세우는 것보다 세우지 않는 것이 낫다."하였다. 세종(世宗)의 상중(喪中)에 병이 심하여 음식을 먹지 못하므로, 그 어머니가 고깃국을 권하자, 대답하기를, "우리 부자 형제(父子兄弟)가 유독 임금의 은혜를 입었으니, 살아서 조금도 보답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깁니다. 죽고 사는 것은 운명에 달려있는 것이니, 고기를 먹고서 사는 것은 먹지 않고서 죽는 것만 못합니다."하였다.
공이 죽자, 공의 아우 창손(昌孫)이 추도사에서 이르기를, "공의 뜻으로 공의 재주를 행하면 넉넉히 왕의 교화를 빛내고 한 시대를 다스리기에 충분하였다."하였다. 문종대왕(文宗大王)이 공을 제사하는 글에 말하기를 "몸을 잊고 나라를 받드니, 기개가 뛰어났다. 신(紳 : 큰 띠)을 드리우고 홀(笏)을 바르게 잡아 당시의 모범[表儀]이 되고, 일을 처리함에 의혹을 결단함은 나라의 미래 일을 제시하였다."하였다.
근래에 공은 청백리 중 청백리의 8인 선발에 들어 국가의 모범이 되었다. 공은 비록 세상을 마쳤으나 후인들이 마음에 잊지 않았다. 이는 몸이 죽었을지라도 혼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 백대에 영원히 전하여 오래갈수록 더욱 빛난다는 것이리라. 명(銘)을 말한다.
淸白垂範 청백으로 모범을 내린
貞節鄭公 정절 정공,
世宗盛世 세종의 성대한 시대에
君臣化衷 임금과 신하가 마음을 화합하였네.
一私不行 조금도 사사로움을 행하지 않고
剛直盡忠 강직하여 충성을 다하였네.
南道橫恣 전라도에서 횡푸한 짓을 하자
一治有功 한 번 다스려 공효가 있었네.
在臺振綱 사헌부에 있을 때 기강을 떨치자
君亦慙愧 세종 역시 부끄러워하였네.
觀察北道 함길도(咸吉道) 관찰사로 나가
荒政善治 기근 행정에 훌륭한 치적이 있었네.
令行禁嚴 명령이 시행되고 금법이 엄한 것은
判事京師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때였네.
長銓拜命 판이조사(左參贊兼判吏曹事) 임명되어
賀客有誰 축하객 누가 있었던가.
銓注至公 인사 행정 지극히 공정하여
人無怨斯 원망하는 사람 없었네.
爲子求官 아들 위해 관직을 구하는 일
何嘗一思 어찌 한 번이나 생각한 적 있었나.
旣中鄕試 향시에 합격한 뒤인데도
除名勿施 아들 이름 빼 버려 시행하지 않았네.
忘身奉國 몸을 잊어 나라를 받들고
爲國蓍龜 나라의 미래 일을 제시하였네.
古今師表 고금의 사표
沒世不忘 세상을 마쳐도 잊지 못하네.
百代永傳 백대에 영원히 전하여
愈久愈光 오래갈수록 더욱 빛나리.
啓佑後世 후세를 도와 인도하여
賴而致祥 의지하여 상서로움을 불러오리.
2009년 춘분절에 청주(淸州) 이충구(李忠九) 삼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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