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 때 진사(進士)가 되었던 흠지(欽之)는 양탁공(良度公) 양생(良生)의 손자(孫子)로 풍채가 좋고 성품이 강직했으며, 특히 사학(史學)과 천문학(天文學)에 정통하여 세종(世宗)의 명을 받아 역법(曆法)을 연구했고, 그의 아들 갑손(甲孫)과 창손(昌孫)이 크게 현달했다.

세종(世宗) 때 독격골(獨擊* )로 조정이 두려워하였던 갑손(甲孫)은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대강(臺綱)을 바로잡아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고 판한성 부사(判漢城府事)와 예조 판서(禮曹判書)·좌·우참찬(左·右參贊)을 지내고 중종(中宗)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필월잡기(筆苑雜記)」에 의하면 그의 성격이 청직(淸直)하고 엄준(嚴峻)하여 자제(子弟)들도 감히 사사로운 일로써 청탁을 못했다고 한다. 일찍이 함길도 감사(咸吉道監司)가 되었을 때 조정의 부름을 받아 한양(漢陽)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함길도 향시(鄕試)의 방(榜)이 발표되었음을 보니 그의 아들 오(烏)가 방에 들었으므로 시관(試官)을 불러 꾸짖기를 "늙은 것이 감히 나에게 아첨을 하느냐. 내 아들 오(烏)가 학업에 정진하지 못하거늘 어찌 요행으로 합격시켜 임금을 속이려 하느냐."하고 아들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시관을 파면시켰다고 한다. 「용재총화( *齋叢話)」에는 다음과 같이 그의 청렴 강개한 성품을 기록하고 있다. 그가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을 때 이조(吏曹)에서 사람을 벼슬에 잘못 임명한 일이 있었다. 세종(世宗)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와서 상참(常參: 조정에서 매일 정례적으로 행하는 조회)을 받을 때 정승 겸 판서 하 연(河 演)과 이조 판서 최 부(崔 府)가 함께 입시(入侍)하였더니 갑손이 왕에게 아뢰기를 "최 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하 연은 조금 사리를 알면서도 알맞지 못한 사람을 등용하였으니 국문(鞫問)하기를 청하옵니다." 하였다. 임금이 화한 얼굴로 양편을 화해시켰으나 조회가 끝난 뒤에 밖에 나와서 둘 다 땀이 물 흐르듯할 때 갑손이 웃으면서 "각기 제 직분을 다했을 뿐이니 서로 해침은 아닙니다."하며 녹사(錄事)를 불러서 "두분이 심히 더우신 모양이니 네가 부채를 가지고 와서 부쳐 드려라"하고는 조용한 태도로 조금도 후회하고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다고 한다.

갑손(甲孫)의 아우 창손(昌孫)은 세종 때 부제학(副堤學)으로 춘추관(春秋?)의 수찬관(修撰官)을 겸하여「고려사(高麗史)」와「세종실록(世宗實錄)」·「치평요람(治平要覽)」등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세조(世祖) 때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왕의 두터운 총애를 받았고, 세조가 신임하여 "내가 경을 공경하기를 숙부와 다름 없소"하면서 창손이 술을 권하면 반드시 어좌(御座)에서 내려앉았으며 술을 못 마시는 창손을 위하여 좌석에 반드시 단술을 준비케 하였다고 한다.

돌아갔고, 영남(嶺南)에서도 그의 부음(訃音)을 듣고 100여 명의 선비가 올라와 부조(扶助)만을 하고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