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래 정씨(東萊鄭氏)의 시조(始祖)가 되시는 안일호장 휘 회문공(安逸戶長諱繪文公)은 동국정
씨(東國鄭氏) 34世로 신라 경애왕(新羅景哀王) 때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낸 휘(諱) 완(玩)의 아드님이시고 동래(東萊)를 관(貫)으로 하시었다.

거슬러 정씨 성(姓)의 유래를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동경지(東京誌)에 의해 살피면, 우리 나라 정씨의 시조로 추앙 받는 휘 지백호(諱智伯虎)께서 기원전 117년(漢武帝 甲子) 경주 화산(慶州花山)에 강림(降臨)하여 부족국가(部族國家)이던 사로(斯盧)의 여섯 고을 중 취산진지촌(자山珍支村)을 다스리면서 신라건국(新羅建國)의 모체(母體) 를 이루는데 공헌하여 좌명공신(佐命公臣) 낙랑후(樂浪侯)에 책봉(冊封)되었다.

서기 32년(新羅儒理王九年 壬辰) 취산진지촌이 본피부(本彼部)로 개칭(改稱)되면 서 公의 현손 대(玄孫代)에 이르러 다른 다섯 촌장들과 함께 정씨(鄭氏)의 성(姓)을 하사(下賜)받아 동국 정씨(東國鄭氏)의 시조가 되었고, 516년(法興王三 丙申)에 문화 (文和)로 시호(諡號)를 추증(追贈)받았으며, 656년(太宗武烈王三 丙辰)에 감문왕(甘文 王)에 추봉(追封)되었다.

이후로 우리 나라 땅에 정씨 성을 가진 이들이 널리 퍼지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우리 동래정씨의 시조이신 회문공에 대한 생몰(生歿) 연대(年代)와 배위(配位), 묘소 등의 기록이 전무하여 公의 일생에 대한 면면은 알지 못한다. 다만 고사촬요(古史撮要)에 의하면「서기 927년(景哀王,丁亥) 견훤의 난(亂)을 피해 바다 가운데의 섬으로 나아 갔던 회문공께서 931년(辛卯)에 신라로 돌아오신 후에 동래호장(東萊戶長)에 올라 오 랜 기간 선정(善政)을 베푸시어 안일호장(安逸戶長)의 칭(稱)함을 받았다.」라고 한다.

1655년 을미보(乙未譜) 때 公을 시조로 하여 1세(世)로 기록해오다가 문안공 항 (文安公沆)의 묘지석(墓誌石)이 발견되어 선대의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으나 보윤호장 휘 지원공(甫尹戶長諱之遠)에 이르는 시기를 앞서는 일들은 고증(考證)할 자료가 없 는지라 병신보(丙申譜)를 발간하며 公의 휘(諱)를 족보 첫머리에 별도로 적어 공경 (恭敬)의 도리(道理)를 다하고 보윤공을 1세로 기록하기에 이르렀다. 다시 1928년에 발굴된 복야공(僕射公)의 묘지석(墓誌石)에 선대의 기록이 있었으나 그 역시 1세 보 윤공(甫尹公) 이전의 기록이나 시조 회문공에 대한 언급을 찾을 길이 없어 선조(先祖) 들이 발간(發刊)한 옛 족보(舊譜 -1655年版 乙未譜)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고려사 향직고(高麗史鄕職考)에 의하면 983년(高麗 成宗 癸未)에 여러 대(累代)에 걸쳐 훌륭한(優美) 가풍(家風)을 지닌 가문의 자손에게는 처음에 병사(兵史)나 창사 (倉史)로 임명하고 호장에 이르게 하여 그 고을의 백성들을 다스리게 하였으니 호장 은 향직(鄕職)의 가장 윗자리로서 지방의 영주(領主)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998년 (穆宗 戊戌)에 여러 고을을 다스리는 호장의 나이 70을 넘으면 그 간의 공을 기리어 특별히 안일호장이라 칭하게 하였는데 당시의 향직에 대한 기록에 호장은 저적(著籍) 이 오래되고 가풍(家風)이 뿌리 깊은 집안의 인물로 삼았다 하니 온화하고 불편부당 (不偏不黨)하여 남과 적을 삼지 않는다는 가통(家統)을 지켜 오면서 명문거족(名門巨 族)의 지위를 굳혀 온 동래정씨(東萊鄭氏)의 근본(根本)은 公으로부터 유전(遺傳)한다 고 보아 타당할 것이다.

그 후 조선조(朝鮮朝)에서 17명의 상신(相臣)을 비롯한 수많은 명신현관(名臣賢官) 을 배출해낸 동래 정씨는 전주 이씨(全州李氏), 안동 김씨(安東金氏)와 더불어 <삼대 상신가문(三大相臣家門)>으로 유명을 떨쳤으며, 국난(國難)이 있을 때마다 충의열사 (忠義烈士)가 배출되어 도덕과 학문이 뛰어났던 석학(碩學)들과 함께 명문 동래 정씨 의 가통(家統)을 더욱 빛나게 한 것도 모두 이와 같은 맥락(脈絡)이라 할 수 있다.